[인간합격] 라디오스타 '박민수' 그리고 '안성기'

낡아서 더 빛나는 것들에 대하여

by 도시남자 수식씨

아침 출근길, 시청역에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이어지는 지하보도를 걷는다. 무심코 걷다 보면 을지로 4가 즈음에서 묘한 풍경과 마주한다. 최신형 스마트폰 하나로 우주선 궤도까지 계산할 수 있는 세상에, 묵직한 전자계산기를 진열해 둔 가게가 있다. 당근마켓 무료 나눔 코너에나 있을 법한 필름 카메라, 누가 신을까 싶은 투박한 운동화들도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새벽부터 나와 낡은 물건들을 닦고 조이는 사장님들의 굽은 등을 볼 때면, 솔직히 조금 짠한 마음이 들곤 했다.


안성기 배우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에, 개인적인 추모의 마음으로 그의 대표작 <라디오 스타>를 다시 보았다. 맥주 한 캔을 곁들여서. 88년 가수왕 출신이지만 이제는 미사리 카페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가수 ‘최곤’과,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지키는 매니저 ‘박민수’의 이야기다. 영화 초반, 그들의 모습은 출근길 지하상가에서 느꼈던 감정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허름한 점퍼 차림으로, 쌍팔년도 식 의리 하나를 붙잡고, 사고 친 가수 대신 PD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매니저 박민수. 최곤과 함께 잊혀진 오래된 도시 영월에서 재기를 꿈꾸는 그의 모습은 안쓰러움을 넘어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자, 손에 들린 맥주 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낡은 다방에서 배달 오는 커피, 철물점 김 씨와 세탁소 최 씨의 투박한 대화, 비 오는 날 씌워주는 우산 하나. 촌스럽고 느려 터진 그 풍경들이 이상하게 마음을 울렸다. 새로운 것이 무조건 정답은 아니었다. 최곤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사고를 쳐도 묵묵히 받아주는 박민수의 ‘미련한 의리’는, 촌스러운 게 아니라 진득한 것이었다. 을지로 지하상가의 계산기가 단순히 ‘기능’을 파는 게 아니라 상인의 ‘세월’을 진열해 놓은 것이듯, 박민수의 매니지먼트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람’을 지키는 일이었다.


우리는 늘 새것, 빠른 것, 효율적인 것에 목맨다. 나조차 후배들에게 "요즘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도태돼"라며 꼰대 소리를 하면서도, 정작 쏟아지는 신조어들이 외계어처럼 들려 젊은 친구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겉돌지 않던가. (푸바우도 몰라서 약올림 당하지 않았던가.) 빠름이 미덕인 세상에서 그들의 느림은 뒤처진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속도로 단단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낡은 것은 폐기해야 할 쓰레기가 아니라, 시간이라는 양념이 잘 배어든 ‘오리지널’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빗속에서 본인의 우산으로 최곤을 씌워주는 박민수의 모습에 기어이 눈물이 터졌다. 갱년기인가 싶어 잽싸게 눈물을 훔쳤지만,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단순히 영화가 슬퍼서가 아니라, 나 역시 점점 ‘오래된 것’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출근길 지하보도에서 먼지 쌓인 카메라를 볼 때면, 혀를 차는 대신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아직 그곳에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세상이 아무리 LTE니 5G니 하며 속도를 올려도, 2G 폰처럼 투박하게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덜 차가운 법이다.


오래되었다고 무시하지 마라. 새롭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다. 익숙한 구두가 발을 덜 아프게 하고, 오래된 친구가 말하지 않아도 내 속을 알아주듯, 우리네 인생도 조금은 낡고 해져야 비로소 편안해지는 것 아닐까.


화면에서도 현실에서도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안성기 배우님의 얼굴이 잔상처럼 남는다. 그 따뜻하고 뭉클한 연기를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먹먹하다. 영원한 우리의 국민배우, 고(故) 안성기 배우님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그곳에서는 아픔 없이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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