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뉴브 강물도 깎아내지 못할 그 미련한 고집에 대하여
가끔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건축가에게는 건물을 올리는 일이, 화가에게는 캔버스를 채우는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밥벌이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지독한 예술이 된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속 라즐로 토스의 삶을 보고 있으면, 예술이란 결국 한 인간이 세상에 남기는 가장 처절하고도 슬픈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흔 중반을 넘기며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숨이 차는 나이가 되고 보니, 무언가에 영혼을 통째로 저당 잡힌 이들의 삶이 경이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짠하게 다가온다.
영화 속 한 대사가 유독 가슴에 박혔다. "세상 어느 것도 그 자체로는 설명이 안 돼요.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걸 만드는 거죠." 그는 전쟁이라는 지옥 속에서도 자신이 설계한 프로젝트들이 살아남았음을 강조한다. 사람의 기억은 흐릿해지고, 정치적인 수사들은 강물처럼 천박하게 흘러넘치겠지만, 자신이 지은 건물은 다뉴브 강물의 침식조차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다는 호언장담. 그것은 오만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본질을 향한 갈망이었다. 인간은 변하고 환경은 무너지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그가 믿는 예술의 유일한 구원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 구원의 과정은 참으로 지독했다. 나치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통과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한 채 미국으로 건너온 그를 기다린 건 비참한 빈민의 삶이었다. 자본가 해리슨의 미친개 같은 갑질과 모욕을 견디고, 심지어 마약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그는 설계도를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공적인 역사의 비극과 사적인 삶의 희망을 '건축물'이라는 실체 하나에 기어코 담고 싶어 했다. 마약에 의존해서라도 끝까지 버텨낸 건, 그 건물을 완성하는 것만이 자신의 부서진 존재를 증명할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예술가라는 존재들이 참으로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들처럼 살 자신도 없고, 내 삶을 통째로 불살라 무언가를 짓고 싶지도 않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웃으며 사는 지금의 평범함이 훨씬 편안하다. 하지만 내일이면 잊힐 가벼운 말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침식을 견디며 꼿꼿이 서 있는 라즐로의 건물 같은 고집이 문득 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대단하지만 서글픈 사람들. 그들이 만든 단단한 세계 덕분에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도 가끔은 영원이라는 단어를 꿈꿔보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