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스타트업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남들은 회삿돈으로 투자처를 찾아다니니 폼 나는 '갑(甲)'의 위치라 짐작하지만, 실상은 위로는 임원들 눈치 보고 아래로는 실무 챙기느라 바쁜, 그저 그런 월급쟁이일 뿐이다. 사업계획서를 검토하고 IR 미팅을 진행하며 창업자들을 만난다. 가진 거라곤 노트북 한 대와 패기뿐인 그들을 보면 가끔은 기가 찬다. "저희 기술이 세상을 바꿀 겁니다"라며 이글거리는 눈빛을 쏘아대는데, 사실 거절당하기가 일쑤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들은 문전박대를 당하고도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다시 연락해 온다는 점이다. "팀장님, 지난번 말씀하신 부분 다시 고민해 봤습니다!"라며 들이미는 그 낯짝 두꺼운 얼굴을 보고 있자면, 묘한 존경심마저 든다. 그들에게는 소위 '철면피'가 기본 장착되어 있다. 창업가들이 보여주는 반면 식당에서 반찬을 더 달라는 말도 못 해 쭈뼛거리고, 팀원들 싫어할까 봐 회식하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그 '밑져야 본전'의 정신, 그 뻔뻔함이 사무치게 부러운 요즘이다.
나이 마흔 줄에 접어드니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게 죽기보다 싫어진다. 어디 가서 "이것 좀 가르쳐주세요"라고 말하면, 왠지 내가 밥벌이하고 살아온 세월이 부정당하는 것 같고 무능해 보이는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게 된다. 회의 시간에 요즘 애들이 쓰는 신조어가 튀어나오거나, 난생처음 듣는 기술 용어가 난무할 때를 떠올려 보자. 예전 같으면 아는 척하며 식은땀을 흘렸겠지만, 이제는 전략을 바꿨다. 그냥 허허 실소 한번 터뜨리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아이고,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래. 그게 무슨 말이야? ㅋㅋ" 이렇게 먼저 내 약점을 까발리며 웃어버리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신기하게도 내가 이렇게 무장해제하고 나오면 상대방도 경계를 풀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무지를 인정하는 뻔뻔함, 그것은 늙어가는 뇌세포를 방어하고 옹졸한 자존심을 지키는 나만의 생존법이다.
인간관계에서도 이 뻔뻔함은 꽤 훌륭한 윤활유가 된다. 사실 며칠 전 친구 녀석에게 술 한잔하자고 했다가 "요새 좀 바쁘다"며 거절당했다. 예전 같으면 '내가 다시는 연락하나 봐라. 지가 무슨 연예인인 줄 아나?' 하며 자존심 상해 꽁해 있었을 거다. 하지만 창업가들이 투자자에게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듯, 관계도 맷집이 필요하다. 조만간 날 잡아서 그 녀석에게 다시 한번 툭 던져볼 생각이다. "야, 바쁜 거 좀 끝났냐? 다음 주엔 소주 한잔하자." 그래서 또 안 된다고 하면? 뭐 어떤가. 세상에 술 마실 친구가 그 놈 하나뿐인 것도 아니다. 남들은 생각보다 내 제안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저 타이밍이 안 맞았을 뿐이다. 거절을 내 존재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게 쿨한 도시남자 수식씨가 되는 길이다.
결국 인생은 누가 더 우아하게,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철면피를 까느냐의 싸움인 것 같다. 사실 나에게도 며칠간 끙끙 앓던 업무과제가 하나 있다. 정말 하기 싫은, 입이 잘 안 떨어지는 부탁을 비즈니스 관계자에게 해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거절당할까 봐, 혹은 내 모양새가 빠질까 봐 계속 미뤄왔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쭈뼛거리지 않고 개운한 마음으로 질러볼 생각이다. "어려운 부탁인 거 알지만, 한번 도와주세요."라고. 들어주면 고마운 거고,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남들 눈치 보느라, 거절이 두려워 속을 곪게 만드는 것보다, 가끔은 뻔뻔하게 내 몫을 챙기고 할 말은 하는 도시남자 수식씨가 되어보려 한다. 그게 이 팍팍한 세상에서 우리 같은 보통의 직장인이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는 비법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