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모든 걸 품은 한라산”

[순례노트3-④]제주 관음사와 4.3의 비극

by 동욱

4월에 찾은 제주 관음사는 친구들과 함께한 선물 같은 순례였다.

한라산 관음사 일주문

한라산 650m 기슭에 자리 잡은 관음사는 ‘액자 속의 액자 그림’ 같은 풍경으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한라산 관음사 천왕문 가는 길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일직선으로 난 길은 보는 맛이 시원한데다, 양 옆에 나란히 선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길과 조화를 이룬다.

유럽의 어느 정원이나 가로수 길을 닮았다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했다.


영상으로 담아도 멋있을 것 같다고 하니, 실제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같은 드라마에서 종종 배경으로 등장했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 길을 따라 좌우에 앉아있는 부처님들을 보면 이곳이 바로 제주라는 생각이 든다.

부처님의 얼굴은 여느 절과 비슷한데 부처님 머리 위에 독특한 모자가 있다. 패랭이 같은 모자, 제주 고유의 ‘정동벌립’이라고 한다.


댕댕이 넝쿨 혹은 정동이라는 식물 줄기를 이용해 만든 전통모자다. 시원하고 질기며 물을 먹지 않아 농사지을 때 머리에 얹어 비를 막아주는 용도로 사용했단다.


제주가 수용한 불교, 부처의 모습 아닐까 생각하다가 제주도에는 언제부터 불교가 있었는지 궁금해 졌다.

제주 전설과 민담에는 ‘괴남절, 개남절, 동괴남절’이라는 이름의 사찰이 등장한다고 하며, 탐라국 시대 때 바닷길로 남방불교가 전래돼 왔다는 견해도 있단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관음사의 기록이 남아있다고 관음사 홈페이지는 전하고 있다.


그런데 숭유억불의 조선시대, 특히 조선 중기 이후에는 왕실의 후원을 받던 보우대사도 제주에 유배된 뒤 죽임을 당할 정도 아닌가?


“조선 숙종 때인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한라호국신사(漢拏護國神祠)인 광정당(廣靜堂)에서 기도하던 풍습을 금지시키고, 신당 129개를 모두 불태웠다. 또한 유교를 권장하기 위해 미신적으로 흐르는 불교를 배척해 제주의 사찰을 불태웠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주 관음사에 있는 봉려관 스님 동상

이렇게 뿌리째 뽑혀나간 불교가 제주에 다시 움튼 건 20세기 초반 봉려관 스님의 사투와도 같은 노력 덕분이라고 한다.


1899년 관세음보살 꿈을 꾼 뒤 땅속 토굴인 해월굴에 들어가 6년간 정진한 봉려관 스님. 법당을 짓고 통영 영화사 등지에서 불상과 탱화를 모셔와 여법한 사찰의 모습을 만들어 갔다고 한다.

제주 관음사 해월굴 입구

1908년 관음사를 창건해 제주의 200년 무불(無佛)시대를 끝낸 봉려관 스님.


“구름 걷히니 낯이 붉음을 보네

구름 있을 적엔 구름이 붉은 줄 알았다.

봉우리 오르려는 참 뜻을 아는가

무주공산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오도송(悟道頌)>

제주 관음사 해월굴 내부

스님의 오도송을 헤아리며 자리를 옮기는 데 가슴시린 팻말이 발길을 멈춰 세운다.

4.3 피해사찰-관음사


제주 4.3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정의하고 있다.

1939년 불이 나 피해를 입은 제주 관음사도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빠져들게 된다.


한라산 중턱에 있는 관음사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4.3 당시 토벌대와 입산 무장대가 첨예하게 대치했고 치열한 전투도 이어졌다. 결국 1949년 2월 12일 관음사 대웅전을 포함한 전각 모두가 불타 사라졌다.


어찌 사찰의 운명뿐이랴?

제주 관음사 4.3 사건 유적지. 참호 혹은 진지로 보인다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한강,『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2021,p.220>


‘제주 4.3 위원회가 확정한 희생자 수는 2024년 현재 14,822명이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수치일 뿐, 진상조사보고서는 인명피해를 2만 5천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한다. 4.3 당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생긴 희생인데,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또한 제주공동체에 남긴 후유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족쇄가 유가족들을 얽어맸으며, 고문 피해로 인한 후유장애, 레드 콤플렉스 등 정신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출처: 제주4.3 평화재단 홈페이지>

한라산 자생 왕벚나무와 부처님

현대사의 비극이 남긴 참혹하고 끔찍한 상처는 제대로 그리고 잘 치유될 수 있을까?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한강,『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p.325>


그 아픈 역사를 현장에서 지켜봤을 관음사 왕벚나무.

한라산에서만 나고 자란 제주 고유종인 왕벚나무는 올해도 어김없이 하얗고 붉은 꽃잎을 피워내고 있다.

한라산 관음사 일대는 제주 고유종인 왕벚나무의 자생지이다.


1948

안은주


그 시간 그 계절 그 공기 그 삶 속에

난데없이 쏟아졌던 혼돈

길게 내뿜어진 붉은 숨소리들

소름 끼치게 붉어졌던 사람들


모든 것을 담아낸 바다

모든 것을 품은 한라산


살아 있는 사람들과 섞여

기록된 말이 된 사람들


이유도 없이 붉었던 섬은

별이 빛나는 푸른 섬이 되려 한다


모든 이들의 미래가 되어

<신경림 외,『검은 돌 숨비소리-4.3 시 모음집』,걷는사람, 2018,p.119 > ///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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