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노트3-⑤]안성 청룡사와 꼭두쇠 바우덕이
청룡사 대웅전의 첫 인상은 여느 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601년 다시 지은 정면 3칸에 측면 4칸 건물로, 八자 팔작지붕에 연꽃과 꽃봉오리가 화려하게 조각돼 있으며, 1985년 보물로 지정됐다’고 하는데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대웅전을 옆에서 바라보자 뭔가 느낌이 묘했다.
건물을 받치는 기둥이 기우뚱하고 옆으로 휘어져 있는 것 아닌가?
‘어! 건물이 왜 이러지?, 기둥이 기울어져 있으면 무너질수도 있겠는데’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게 청룡사 대웅전의 진정한 멋이었다.
굵고 울퉁불퉁하지만, 나무가 자라면서 휘어져 나간 모양을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정도 크기라면 곧고 반듯하게 재단해서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오히려 원형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대웅전을 빙 돌아 받치고 있는 열 다섯 그루 나무의 숨결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 했다.
알고서 다시 보니 대웅전이 마치 불경 소리에 맞춰 흔들~흔들~ 좌우로 몸을 흔드는 것 같기도 하고, 범패에 맞춰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한국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설명 문구를 뒤늦게 확인하고는 괜스레 무색해졌다.
수백년 세월 동안 노후화와 변형이 심해지자 2016년부터 2021년 12월까지 해체보수를 진행했고 지금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대웅전 내부에도 보물이 있다.
조선후기 불교조각의 첫 장을 여는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이다. 17세기 초반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순례자의 눈에는 불상도 불상이지만 대웅전 내부 그림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특히 보살님들이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반야용선도가 유독 인상적이다.
배 중앙부에 아미타부처님이 서 있고 양옆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반야용선도와 달리 배 앞뒤에서 노를 젓는 이가 인로왕보살과 지장보살이 아닌 남녀 2명이다.
또 머리에 망사를 두르거나 목에 굵은 염주를 건 사람들이 탑승해 있다. 한 사람은 작은 북을 머리 위로 들고 있으며 배 뒤쪽에서는 피리나 거문고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도 발견된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을 자축하려는 걸까? 배에서 한바탕 음악 축제라도 벌이려는 모양새다.
“굿중패(혹은 사당패)의 인물들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굿중패(사당패)의 인물을 왕생자로 표현한 것은 기댈 곳 없는 천민까지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조선 후기 청룡사를 중심으로 발달한 연희문화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불광미디어,‘극락으로 가는 배-불화 속의 반야용선’,2023.11.23.>
청룡사를 중심으로 연희문화가 발달했다고?
조선 후기 사당패와 절은 서로를 돕고 챙기는 상부상조,공생관계였다고 한다.
사당패는 절에서 준 신표를 가지고 전국을 돌며 공연을 했다고 한다. 절에서 발급한 신표가 일종의 신원 보증서였던 셈이다. ‘이들 사당패는 우리 절 인근에 살고 있으니 어디로 도망갈 사람들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보증했다고나 할까?
절에서 사당패가 살아갈 터를 제공해 주면 사당패들은 전국 순회 공연으로 번 돈, 공연 수익금의 일부를 절에 시주하는 행태로 상부상조했다. 또 공연을 하지 못하는 겨울에는 절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해주며 살아갔을 법도 하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 가장 큰 후원자인 왕실의 도움이 시들해지자 불교 사찰에서는 새로운 후원자로서 평민과 천민을 발굴하고 더불어 상생으로 나아간 것이다.
청룡사 반야용선도는 19세기 초반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는 데, 그 이전부터 사당패와 절의 공생관계가 뚜렷이 발견된다.
17세기~18세기에 있었던 청룡사 불사는 대웅전 중창과 동종 제작, 감로탱과 괘불탱 제작 등 모두 4건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이름들이 시주자로 나온다. 바로 사당패의 이름, 이른바 재인(才人)의 등장이다.
“청룡사 동종은 현종15년, 1674년에 제작되는 데 시주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천민이나 재인으로 추정되는 자들이 다수 보인다. 여기에서 김개야지, 정어질산은 평민의 이름인데, 특히 정어질산은 ‘어질산이’라는 재인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
1682년에 제작된 감로탱에도 ‘박동질이’라는 재인 이름을 가진 후원자가 보인다. 이들 재인은 재주를 부리면서 흥미로운 유흥을 제공해 사람들을 안성 장터로 유인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감로탱 후원자 20명 가운데 가선대부 이진한이라는 양반 이름을 빼면 19명은 직함이 없거나 성씨 없는 두 자 이름인 걸 보면, 평민이나 천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름이 기록돼 있는 최씨 말춘과 김씨 ○리덕은 여성이다. 재인의 흔적은 숙종 46년 1720년 청룡사 중수 사적비에서도 등장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청룡사가 당시에 재인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룡사의 감로탱과 동종 등의 후원자를 분석해 볼 때 ‘사당패’의 기원을 17세기 중반까지 올려 볼 수 있다.” <황현정,「조선후기 안성지역 불사와 후원자 연구」, 한국교원대 박사논문,2012,pp.83~90>
이들 사당패들은 1682년 제작된 청룡사 감로탱에 실제로 등장한다. 감로탱 하단에는 붉은색 초록색 옷을 입고 재주를 넘는 모습, 비파나 작은 북을 연주하는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청룡사 인근에는 또 불당골이 있다.
‘불당골’을 국어사전에서 검색하면 ‘남사당패들이 덧뵈기를 연희하던 장소로 전국에 산재해 있다.’라고 나온다. 덧뵈기는 ‘남사당놀이의 다섯째 놀이인 탈놀음으로, 춤보다는 재담과 몸놀림이 우세한 풍자극’이라고 한다.
청룡사와 그 인근 지역이 사당패의 삶의 터전이자 주요 공연장인 셈이다.
이 곳, 청룡사와 불당골이 배출한 슈퍼스타가 안성 남사당패의 전설적 인물인 바우덕이, 김암덕(1848~1870)이다.
가난한 소작농의 딸인 바우덕이는 5살 때 남사당패에 들어갔으며 줄타기나, 소고 연주 같은 기예가 출중했다고 한다. 불과 15살의 나이에 여성 최초로 꼭두쇠가 돼 전국 공연을 누볐다고 하니 요즘으로 치면 세계를 열광시키는 K-팝 아이돌 그룹의 리더 격 아닐까 싶다.
특히 1865년 경복궁 중건 공사 위문 공연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출중한 미모에다 소고를 갖고 뛰어난 공연을 펼친 바우덕이에게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옥관자를 하사했다니 말이다.
옥관자는 말 그대로 망건의 관자놀이쯤에 다는 옥으로 만든 작은 고리로 정3품의 신분을 상징한다. 바우덕이에게 정3품 당상관 직위를 수여했다는 걸 의미한다.
당대의 슈퍼스타 바우덕이는 그러나 계속된 유랑 공연에 지친 탓일까? 23살의 나이에 폐병으로 요절한다.
청룡사 바로 옆에는 그의 사당과 동상이 세워져 있고, 해마다 가을이면 ‘바우덕이의 예술혼을 기리는 안성맞춤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가 안성일대에서 열린다.///T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