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노트3-⑥]보은 복천암과 신미 그리고 세종
“내가 왕이 될 상인가?”
2013년 개봉한 영화 「관상」의 대사다. 영화 속 수양대군이 관상쟁이를 만나 한 말이다. 수양대군 이유(1417-1468)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조선왕조 7대 임금 세조(재위:1455-1468)가 됐다.
세조는 1464년 행궁을 잡은 뒤 속리산 복천암에서 3일 기도를 올린 적도 있다. 소나무가 가지를 들어 왕의 길을 터주기도 했다. 정이품송이다.
속리산 탐방지원센터에서 복천암까지 이어지는 4km 탐방로. 세조가 다녔던 길을 재현해 2016년 ‘세조길’로 단장했다.
9월 마지막 날 세조길.
선선한 바람이 오솔길을 휘감고 있고, 발걸음마다 솔향이 뒤따른다. 아직은 한여름마냥 따가운 햇볕이지만 아름드리 소나무와 떡갈나무들이 이룬 울창한 숲 터널을 쉬이 뚫지 못한다.
호수 같은 수원지는 산 모양을 그대로 비쳐내 명징하다.
12살의 어린 조카, 단종(1441-1457, 재위:1452-1455)을 폐위시킨 뒤 결국 죽게 만들고, 피의 살육전 끝에 왕권을 찬탈한 업보 때문일까? 극심한 피부병에 시달린 세조가 복천암 바로 앞 계곡에서 목욕을 했다.
목욕소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세조는 오대산 상원사 인근 계곡에서 목욕할 때 문수 동자를 만나 피부병이 나았다는 설화도 있는데, 이곳 목욕소에서도 효험을 봤다고 한다.(참고: 사찰순례자의 노트1-⑩ 세조와 문수동자…부처님 사리는 어디에)
그런데 세조는 복천암에 왜 왔을까?
돌 틈 사이에서 복된 물이 나온다는 복천암(福泉庵). 조선시대에는 암자가 아닌 어엿한 사찰인 복천사로, 규모도 컸다고 한다. 복천암 뒤 산길을 300미터 가량 올라가면 신미대사와 학조대사의 사리탑이 나온다.
복천암에 주로 머물렀던 신미대사(1403?-1480). 속명은 수성(守省)이며 수암(秀庵)이라 불렸다. 영의정 벼슬을 사후에 받은 조선 정종 때 관리 김훈의 큰 아들이자 호조판서를 지낸 김수온의 형이다. 세종대왕의 명으로 세자와 수양, 안평, 정의공주의 스승이 된다.
특히 수양은 세조가 된 이후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경을 번역하고 간행했는데, 신미 스님이 주관했다고 한다. 세조는 복천암에 머무는 스승 신미에게 자주 안부를 물었고, 복천암에서 대법회를 열기도 했다.
“수온(守溫)의 형이 출가(出家)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신미(信眉)라고 하였는데, 수양 대군(首陽大君) 이유(李瑈)와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심히 믿고 좋아하여, 신미(信眉)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무릎 꿇어 앞에서 절하여 예절을 다하여 공양하고, 수온(守溫)도 또한 부처에게 아첨하여 매양 대군(大君)들을 따라 절에 가서 불경을 열람하며 합장하고 공경하여 읽으니, 사림(士林)에서 모두 웃었다. 守溫之兄, 出家爲僧, 名曰信眉. 首陽大君 瑈, 安平大君 瑢 酷信好之, 坐信眉於高座, 跪拜於前, 盡禮供養. 守溫亦侫佛, 每從大君往寺, 披閱佛經, 合掌敬讀, 士林笑之.” <세종실록116권, 세종 29년 6월 6일 병인 2번째 기사, 1447년>
조선 5대 임금인 문종(1414-1452, 재위:1450-1452)도 즉위하자마자 신미대사에게 스물 여섯 자에 달하는 긴 직책을 내린다. 승하한 아버지 세종대왕(1397-1450, 재위:1418-1450)의 유언을 받들면서 세종과 신미의 인연을 자녀세대로까지 이은 것이다.
“중[僧] 신미(信眉)를 선교종 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로 삼고, 금란지(金鸞紙)에 관교(官敎)를 써서 자초폭(紫綃幅)으로 싸서 사람을 보내어 주었는데, 우리 국조(國朝) 이래로 이러한 승직(僧職)이 없었다.以僧信眉爲禪敎宗都摠攝密傳正法悲智雙運祐國利世圓融無礙慧覺尊者, 以金鸞紙書官敎, 裹以紫綃幅, 遣人就賜之, 我朝以來, 無如此僧職.” <문종실록 2권, 문종 즉위년 7월 6일 무신 1번째 기사, 1450년>
세종대왕의 뜻이 담긴 26자 짜리 승직. 그 내용을 풀이해 보면 세종대왕이 신미대사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잘 보여준다.
‘선종과 교종을 이끌 사람으로 불교의 바른 진리를 전하며, 자비와 지혜를 운용해 나라를 도와 세상과 백성을 이롭게 하고, 원만하고 걸림이 없는, 지혜와 깨달음을 갖춘 인물’.
그런 신미대사를 세종대왕은 ‘직접 침실 안으로 맞아들여 설법을 듣고 존경의 예를 갖춰 대우했다’고 세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신미대사는 조선 건국에 기여한 무학 대사의 제자인 함허 대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인도의 고전어인 산스크리트어(범어,梵語) 등에 능한 언어의 귀재였다.
세종대왕과 협업으로 한글을 창제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세종은 신미에게 자음은 혀의 모양과 입술 모양과 이 모양으로 모음은 천지인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 보라고 상형의 바탕을 일렀던 것이다…(중략)…신미는 세종이 알려준 글자 원리를 가지고 범자(梵字)의 자음과 모음처럼 가획을 해가며 글자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이는 범자에 능한 신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중략)…신미대사가 세종대왕의 초빙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하게 되었다. 신미 대사는 범서(梵書)에서 착안하여 훈민정음을 마무리 지었다“<정찬주,『천강에 비친 달』,작가정신,2014,pp.218-220>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대왕이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며 명칭을 훈민정음이라 했다.…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같은 집현전 학자들이 모든 해석과 범례를 지어 서술했다.”고 나와 있다.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알린 예조판서 정인지는 “그 연원(淵源)의 정밀한 뜻의 오묘(奧妙)한 것은 신(臣) 등이 능히 발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에서 낳으신 성인(聖人)으로써 제도와 시설(施設)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히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한 사람의 사적인 업적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대체로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만물의 뜻을 깨달아 모든 일을 이루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져. 若其淵源精義之妙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恭惟我殿下天縱之聖, 制度施爲, 超越百王,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而非人爲之私也? 夫東方有國, 不爲不久, 而開物成務之大智, 蓋有待於今日也歟!”라며
<세종실록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갑오 4번째 기사, 1446년>
집현전 학사들의 역량을 넘어선 세종대왕의 그 무엇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글 창제의 비밀에는 조선실록의 정사와 흥미로운 야사가 함께 존재한다.
세종 주도-신미 협업이라는 한글 창제설에 대해 ‘사실을 교묘하게 비튼 역사 왜곡이다’, ‘아니다.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 재해석이다’…서로 의견이 분분하다.
정확한 팩트 체크는 관련 학계의 몫일 뿐 순례자는 그 시빗거리에 얽매일 생각은 없다.
다만 소통을 쉽게 하고, 한자로 적힌 대장경을 쉬운 글자로 옮겨 누구나 접하도록 한 세종대왕과 그를 도왔다는 신미대사의 백성과 중생 사랑하는 마음을 기릴 뿐이다.
“나랏말이 한문 글자와 달라 서로 통하지 않아, 많은 백성들이 뜻과 속사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을 딱하게 여겨, 새 글자 28자를 만들어 날마다 편하게 사용하게 하려 한” 그 깊은 마음 말이다.
세종: 그대에게 해준 게 없소. 미안하고 고맙네.
신미: 이미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훈민정음 서문을 108자로 쓰신 것은 108번뇌를
떨치고 성불하라는 뜻 아닐런지요.
세종: 임금 노릇 30년에 겨우 책 한권 남았구만.
신미: 복숭아 속에 씨가 몇 개인지는 누구나 알지만
그 씨 속에 복숭아가 몇 개 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언문은 다가올 세상을 위해 주상께서 새기신
팔만대장경이옵니다.
지금이야 공자와 부처를 담지만
먼 훗날 또 다른 성인이 나신다면
그 분의 말과 뜻도 담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영화 「나랏말싸미」, 2019. 중에서>///T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