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노트3-⑦]보은 법주사와 슈퍼 히어로(?)
9월 마지막 날에 찾은 곳.
지명과 산 이름, 절 이름 모두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은혜를 갚은 땅에 속세를 여읜 산. 그 곳에 부처님 진리가 머무는 절이 있다.
보은(報恩)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이야기다.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에 도착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사천왕상이 있는, 현존하는 가장 크고 넓은 천왕문을 당연히 지날 줄 알았다.
그런데…문을 닫고 보수 중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벽암대사가 1624년 완공한 키 6미터의 천왕들을 못 보다니…. 동방지국천왕은 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발밑에 깔고 짓누르고 있다는데….
외세의 침탈로 고통 받은 백성들의 염원, 천벌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투영된 사천왕상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아쉬움도 잠시, 아주 거대한 부처님이 순례자를 반긴다.
금빛으로 환한 미륵부처님이다.
키가 27미터에 달하고 받침과 광배까지 합치면 33미터 높이란다. 몸무게는 160톤.
법주사는 김제 금산사, 금강산 발연사와 함께 한국 미륵 신앙의 요람이다. 미륵부처님이 있는 건 당연하다.
이 미륵부처님, 안타깝게도 천 년 동안 이런 저런 풍상(?)을 겪었다.
신라시대 진표율사가 청동미륵장륙상을 세웠는데, 1872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에 사용한 당백전 주조를 위해 청동으로 된 미륵상을 몰수했다고 한다.
60여년이 지난 1939년, 당시 주지 스님이 당대 최고의 조각가 김복진에게 의뢰해 시멘트로 미륵불상 조성을 추진했는데 전쟁으로 중단됐고, 1964년 비로소 완공됐단다.
그런데 이번엔 재료가 아쉬웠다.
1930년대엔 첨단 소재였지만 콘크리트 부처님이라는 조금은 박한 평가가 있었고, 부처님 몸에 이런저런 균열도 생겼다. 결국 1986년 해체 후 다시 건립해 지금의 금동미륵대불로 돌아왔다.
법주사 미륵부처님은 물론, 김제 금산사 미륵불은 키가 12미터, 고창 선운사 도솔암 미륵불은 15.7미터,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은 18.12미터에 달한다.
‘왜 미륵부처님은 다 10미터가 훌쩍 넘는 거인이지?’ 하는 호기심이 발동한다.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깨달았으니(天上天下 唯我獨尊,천상천하 유아독존)
온 세상 모든 고통 마땅히 해결해 편안케 하리라(三界皆苦 我當安之,삼계개고 아당안지)”
<석가모니부처님 탄생게>
미륵부처님이 ‘전 세계 모든 고통을 해결해 능히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직속 후계자이기 때문일까?
거대한 몸집의 슈퍼히어로 정도는 돼야 석가모니 후계자로서 모든 고통과 악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일까?
거대한 금동미륵대불 맞은편에는 법주사의 얼굴이라는 국보 팔상전이 있다. 역시 거대한 목조탑이다.
얼핏 보면 탑이라기보다 5층짜리 목조 건물로 보인다. 한 변이 11미터, 높이가 65미터로 임진왜란 때 불탄 걸 1605년부터 1626년까지 20년에 걸쳐 복원했다고 한다.
내부에는 거대한 중심기둥인 ‘심주’가 있고 다른 공간은 천정까지 뻥 뚫려 있다. 탑이라는 게 이해된다.
기둥의 네 면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그린 그림, 팔상도가 있어 팔상전이다.
높이 수 십 미터의 탑이라고 하니 또 한 번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팔상전이 우주 천체와 소통하는 일종의 통신 센터 아닐까? 넷플릭스 시리즈로 나온 소설 『삼체』에서 과학자가 외계 문명과 통신을 주고받는 것처럼….
‘팔상전 우주센터’에서 도솔천이라는 천상계에 있는 미륵부처님에게 번뇌에 시달리는 중생, 도탄에 빠진 백성, 억압받는 민중을 구제해 달라고 SOS를 치고, 그 신호를 받은 ‘구세주’ 미륵부처님이 ‘우주’ 도솔천에서 56억년의 시간을 뚫고 지구에 내려오는 상상 말이다.
팔상전을 보고 난 뒤 부처님을 뵈러 대웅보전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역시 비슷한 느낌이다.
사찰에서 흔히 보기 힘든 2층짜리 건물인 대웅보전은 건평이 170평, 높이가 20미터에 이른다.
내부도 웅장하다. 앉은키가 각각 5미터, 4.9미터, 4.7미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부처님 세 분이 있다.
‘중앙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法身) 비로자나불상이고, 좌측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報身) 노사나불(아미타불)상이며, 우측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화신(化身)으로 나투신 석가모니불상’이라고 법주사는 설명한다.
“우리 사람에게는 정신 즉 마음이 있고, 공부를 하면 지식이 있게 되는 즉 덕이 있고, 사람마다 제각기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 셋을 포용하고 있습니다. 법당 가운데 부처님은 마음을, 왼쪽 부처님은 덕을, 그리고 오른쪽 부처님은 육신을 뜻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원래 한 분이지만 우리 중생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세 몸으로 모셔 놓은 것입니다.”<출처:법주사 홈페이지>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정사각형 모양의 건물로 내부에는 목조 관음보살좌상과 남순동자, 용왕상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륵도량일지라도 다른 부처님들도 살뜰히 모시고 있어 과연 세계의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원통보전 왼쪽에는 통일신라때 만든 희견보살상이 서 있다.
전체 높이는 213cm로 신체와 공양물, 대좌의 3부분으로 구성돼 있으며 720년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신의 몸을 불태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보살로, 『법화경-약왕보살본사품』의 주인공 약왕보살의 전생에 해당하는 보살님이다.
그런데 보살상이 들고 있는 게 향을 피우는 향로가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이 제자인 미륵부처에게 전수하는가사와 발우라는 견해도 제기된다. 희견보살상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 ‘봉의발(奉衣鉢) 가섭형상’으로 보고 있다. <미륵하생경>에서 부처님은 가섭존자에게 “미륵이 세상에 출현하기를 기다리라”고 하셨다. 이런 까닭에 가섭존자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사와 연꽃 발우를 머리에 이고 미륵불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법주사는 미륵의 출현을 기다리는 사찰이기 때문에 <법화경>의 희견보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리에 맞는 이름일 때 신앙적인 감동이 더 크게 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권중서,불교신문,2021.9.21.>
법주사 경내를 순례하고 돌아서 나오는 데 들어올 때 미처 보지 못한 유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중생을 먹이는 건지, 슈퍼 히어로의 솥단지인지…금강문 근처에는 둘레 10.8미터, 직경이 2.7미터, 높이 1.2미터, 무게 20톤짜리 거대한 쇠솥(鐵鑊,철확)이 있다.
중생 3만 명이 먹을 장국을 끓이던 솥이라고도 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들이 이 솥을 이용해 배식했다고도 한다.
솥단지에 짝꿍이랄까?
높이 1.3미터에 길이 4.4미터. 너비 2.4미터짜리 돌 항아리 ‘석조’도 있다. 부피로 따지면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쪽엔 높이가 22미터에 달하는 철당간(鐵幢竿)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부처님의 공덕을 나타내는 ‘당’이라는 깃발을 다는 기둥이다. 고려 때 만든 철당간은 흥선대원군 때 경복궁 복원 재료로 활용하려고 가져가 녹였고, 조선 순종 때 다시 조성했다.
거대한 쇠솥도 그렇고, 기다란 철당간도 그렇고…모두 슈퍼 히어로들이 사용할 법한 도구 아닌가?
돌로 만든 연꽃 모양 연못인 석련지(石蓮池)와 쌍사자석등 같은 국보 3점과 대웅보전과 원통보전 등 보물 12점을 비롯해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높은 국가유산을 품고 있는 법주사.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진리가 머무르는 곳인데, 순례자는 자꾸만 우주공간을 지배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슈퍼히어로가 떠오른다.
모든 사람들을 지키고 보호하며 지극히 편안한 곳으로 안내하는 어벤져스처럼.
법주사
구월이던가요
푸른 그늘을 걸어서 들어가는 길 누군가
팔상전 기와 중 유독 푸른빛 기와 하나 있다는데요
그 기와를 찾으면 극락 간다고 하는데요
혼잣말처럼 흘리던 사람은 딴전이고요
정작 뒤에 가던 우매한 중생 하나
그 말을 날름 주워 들고서는
극락에 미련이 있는지 어쩌는지
팔상전 기와를 샅샅이 둘러보는데요
헛, 그, 참,
어디에도 푸른 기와는 없고 해서
우두커니 하늘만 올려다보는데요
문득 팔상전 꼭대기 위로 펼쳐진 궁륭의 하늘
그 푸른 하늘 한 장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아, 글쎄, 무릎을 치며 환호작약 하더라니까요
허긴, 극락이 거기 있다는 소문은
벌써부터 파다한 세상이지만 말이지요.
<안상학,『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걷는사람, 2020, p.44>///T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