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이천봉! 무양하냐 금강산아. 너의 님을 아느냐”

[순례노트3-⑧]고성 건봉사와 부처님 사리, 그리고 만해

by 동욱

건봉사 가는 길은 비에 젖었다.

산중턱에는 하얀 비구름이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군사 분계선에서 불과 8.5km 떨어진 남한 최북단 사찰.

건봉사 적멸보궁에서 본 풍경

남북 군사 대치의 상징인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안에 있었다는 점이 묘한 긴장감을 불러온다. 비록 지금은군의 검문없이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해 졌지만.

고성 건봉사 불이문

건봉사에 도착하면 순례자를 반기는 건 불이문이다. 1920년에 세워졌으니 100살이 넘었다.


유서 깊은 천년고찰이 곳곳에 있기에 ‘겨우 100살’ 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세월의 트라우마는 그 어느 사찰의 불이문 못지 않을 것 같다.

고종 때인 1878년 큰 산불로 3,183칸의 전각이 모두 불탄 건봉사는 끈질긴 노력으로 642칸의 전각과 126칸의 18개 암자를 갖춘 큰 절이 됐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은 또다시 모든 걸 앗아갔다.

금강산 건봉사 전경.1912년. 건봉사 전시 사진 근접 촬영

“이 지역은 한국전쟁 중 휴전직전까지 2년여에 걸쳐 아군 5,8,9사단 및 미군 제10군단과 공산군 5개 사단이 16차례 치열한 공방을 벌인 건봉산 전투 전적지이며, 이때 건봉사는 완전히 폐허가 됐다.”<출처:건봉사>


총검을 앞세운 숱한 고지전이 동족 사이에 펼쳐졌을 것이고 서로 포화도 퍼 부었을 것이다. 이 참상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각이 불이문이다.


다행히 1994년부터 진행된 건봉사 복원작업으로 불이문은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됐다.

건봉사 왕소나무(일명 장군소나무)

불이문을 뒤로하고 적멸보궁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데 우뚝 서 있는 왕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전쟁의 포화와 산불을 이겨낸 자연의 위대한 생명력을 웅변하는 듯 하다.


건봉사 적멸보궁은 또 다른 전란의 사연을 담고 있다.

건봉사 적멸보궁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과 의병을 모으고 훈련을 시킨 본부 같은 곳이다.(참고: 사찰순례자의 노트3-③ 바위 위에 잠든 소년, 나라를 구하다. 김천 직지사와 사명대사)


강화협상에 나선 사명대사는 일본에서 조선인 포로를 데리고 귀국했다. 이때 왜적이 통도사에서 훔쳐간 부처님 치아 사리도 가지고 와 건봉사에 봉안했다.

건봉사 석가여래치아사리탑과 부도

“신라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서축(西竺)에 들어가 얻은 여래아(如來牙) 10매가 뒤에 왜적에게 약탈되었던 것을 대사는 마침내 간절한 말로 요구하여 돌려받아서 절에 보관하였으니 곧 석탑(石塔)이 이것이다.先時 新羅慈藏法師 入西竺得如來牙十枚 後爲倭所掠去師乃懇辭乞還以藏于寺卽石塔是也.”<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泗溟大師紀蹟碑)중 일부>

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1912년. 건봉사 전시 사진 근접 촬영

10과 혹은 12과로 알려진 부처님 치아 사리 환수는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실물 여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실체가 확인됐다.

조선일보(1986.7.26)와 경향신문(1986.7.30)

1986년 6월 13일 오전 9시 모 대학 건봉사 복원조사단을 사칭한 도굴단이 위장 출입증으로 건봉사에 잠입했다. 사리탑과 부도를 열어 진신사리 12과를 도굴한 것이다.


“수사당국과 문화재관리국은 25일 강원도 고성군 건봉사의 석가여래사리탑과 부도 2기에서 도굴된 석가모니 진신 치아사리 12과 중 8과와 금은동제 사리함을 서울에서 압수, 수사에 나섰다. 수사당국은 골동상가에서 사리밀매를 염탐하는 자가 있다는 조계종 측의 제보로 서울 관악구 봉천동4거리 가야파크 호텔 접수대에 맡겨진 진신사리가 든 서류 봉투를 압수하고 이 봉투를 맡긴 도굴범 일당 3명을 쫓고 있다. 문화재 관리국은 회수한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8과가 건봉사 사리탑에 봉안돼 있던 것과 같다고 확인하고 유물을 처음 공개했다.”<조선일보,1986.7.26.>


건봉사 측은 이렇게 회수한 석가여래치아사리 8과 가운데 3과는 사리탑에 다시 봉안했으며 5과는 일반 신도들이 친견할 수 있도록 대웅전 옆 보안원 내부에 공개 전시하고 있다.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를 친견한 뒤 봉서루에 올랐다.

금강산 건봉사 현판을 단 봉서루

‘금강산 건봉사’ 현판을 단 누각 입구에는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 흑백 사진이 걸려있다.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감로봉 동남쪽 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금강산 건봉사라고 부른다고 한다.


금강산.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우리의 명산.

금강산 비로봉.1922년. 건봉사 전시 사진 근접 촬영

1998년 정주영 회장의 501마리 소떼 방북으로 물꼬를 튼 금강산 관광은 2008년 7월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중단될 때까지 200만 가까운 사람이 다녀간 남북 교류의 산 증거였다.


우리 민족의 명산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화엄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화엄경> 80화엄 45권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의 한 문장이다.

금강산 유점사 전경.1912년. 건봉사 전시 사진 근접 촬영

“바다 가운데 금강산(金剛山)이 있으니 옛적부터 보살들이 거기 있었으며, 지금은 법기(法起)보살이 그의 권속 일천 이백 보살과 함께 그 가운데 있으면서 법을 설하느니라. 海中有處 名金剛山 從昔已來 諸菩薩衆於中止住 現有菩薩 名曰法起 與其眷屬 諸菩薩衆千二百人俱 常在其中 而演說法.” <화엄경 권45 중 32.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


화엄경의 금강산과 우리네 명산 금강산의 선후 관계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금강산에는 장안사와 유점사 같은 유명한 사찰이 많이 있고, 화엄 사상이 우리 불교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그 사실만은 분명하다.

금강산 장안사 대웅보전.1929년. 건봉사 전시사진 근접 촬영

금강산과 화엄경의 인연은 독립운동과 문학사의 거인과 건봉사와의 인연으로 그 맥이 이어진다.


“만이천봉! 무양하냐 금강산아

너는 너의 님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아느냐.

너의 님은 너 때문에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온갖 종교, 철학, 명예, 재산 그 외에도 있으면 있는 대로 태워버리는 줄을 너는 모르리라.”

<한용운,「금강산」중 일부,『초판본 님의침묵』,지식인하우스, 2023, p.81>


만해 한용운(1879~1944)

만해 한용운 생가 동상 (건봉사 만해 한용운 기념관 전시 사진 촬영)

만해 한용운은 1905년 1월 26일 설악산 백담사 연곡 선사 아래에서 출가했으며, 1907년 4월 건봉사에서 최초의 선(禪)수업이라고 할 수 있는 ‘수선안거’를 성취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 등지를 여행한 뒤 건봉사에서 화엄경과 반야경 등을 익혔다.


1929년에는 건봉사와 부속 사찰의 역사를 기록한 ‘건봉사와 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事蹟)’이라는 책도 펴냈다. 건봉사 만해 한용운 기념관에는 그가 남긴 업적을 전시하고 있다.

3.1 독립선언서(건봉사 만해 한용운 기념관)

1918년 민족 계몽을 위해 발행한 잡지 『유심(唯心)』과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3.1 독립선언서」,

그리고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朝鮮獨立에 對한 感想의 大要)」를 실은 「독립신문 제 25호」(1919.11.3.)를 직접 볼 수 있다. 53장에 달하는 이 논문은 참고자료도 없이 감옥에서 쓴 ‘옥중수고’인데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힘이 됐다.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독립신문.1919.11.3(건봉사 만해 한용운 기념관)

1913년 34세때 팔만대장경 가운데 444부의 삼장 중에서 1744회 경전의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 체계화한 핵심 요약집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집필한 만해 한용운.

30대 중반에 이미 불교학의 대사상가였던 그는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세상에 내놓는다.

만해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1926년 초판, 건봉사 만해 한용운 기념관)

서시 격인 ‘군말’과 88편의 시 속에서 “그는 일상적인 생활에 뿌리박고 있는 고유한 한국어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살려낼 수 있는 서정적 발화의 형태를 찾아낸다. 그것은 아주 특이한 대화적 공간을 형성한다. 그리고 대화의 공간 속에 독자들을 끌어들인다.”<권영민,「한용운,‘님’과 그 존재의 시적 인식」,『한용운 문학전집1-님의 침묵 외』,태학사,2011,p.702>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한용운 「군말」중 일부,『초판본 님의침묵』,지식인하우스,2023>

<한용운, 「님의 침묵」,『초판본 님의침묵』, 지식인하우스, 2023, pp.1~2> 쵤영 편집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출세出世의 해탈도 꿈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무심無心의 광명도 꿈입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습니다.”

<한용운 「꿈이라면」,『초판본 님의침묵』, 지식인하우스, 2023,p.105 >

조국 독립을 희망하는 시대정신에 서정성을 아우르는 만해의 시집『님의 침묵』은 ‘깊고 넓은 불교 철학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우리말로, 시의 형식을 통해 풀이한 대장경’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용운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1919년 마포형무소 수감 당시 촬영.

“‘님’은 부처도, 중생도, 조국도, 애인도 될 수 있는 포괄적이면서, 어느 하나의 개념에 매이지 않는 전체의 모습으로 파악되었다.…만해 한용운이 독립운동가, 시인, 불교의 대선사로서 남긴 발자취는 크고 뚜렷하다. 승려인가 하면 독립 운동가요, 독립운동가인가 하면 어느 사이 시인이 되어 있다. 다시 시인 한용운을 찾아보면 대사상가로 변신해 버린다. 그러므로 만해 한용운은 어느 것 하나에 집착해 있지 않으면서 그것과 이미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만해 한용운은 무엇으로 지적될 때 이미 그 세계를 뛰어 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변(無邊)이요 단(斷)과 상(常)이 끊어진 자리에 다시 우뚝 솟아 중정(中正)의 도(道)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한 생애는 민족에 대한 관음보살의 대비원력(大悲願力)이요, 보현보살의 대행원력(大行願力)의 실천자였다. 민족운동가, 불교사상가, 시인으로 집약되는 만해는 청정심으로 극락정토를 지상에 꾸미려는 깊은 뜻을 심어 놓았다.”

<전보삼,「화엄의 관점으로 본 만해사상 연구」, 동국대 박사논문, 2007, pp.87~88> ///TOK///

건봉사 입구 만해당대선사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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