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내린 종 다시 소리를 얻고…“이곳이 관음성지”

[순례노트3-⑨]2005년 산불과 양양 낙산사

by 동욱

2005년 4월 4일 밤 11시 53분 강원도 양양 화일리.


길가 야산에서 시작된 불은 초속 30m, 시속 110km에 달하는 동풍을 타고 무섭게 번졌다. 16개 마을을 삽시간에 휩쓸더니 15시간 만인 5일 오후 3시 10분 낙산사를 덮쳤다.

2005년 4월 산불로 불타는 낙산사 전각(촬영 영상 캡쳐)

그야말로 불바다였다.

사투가 이어졌지만 역부족이었다. 홍예문과 원통보전 같은 목조건물 21개 동이 스러졌고, 보물 479호 동종은속절없이 녹아내렸다.

2005년 산불로 불타는 낙산사 동종(촬영 영상 캡쳐)

1469년 조선 예종이 아버지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한 높이 158㎝, 지름 98㎝의 동종은 구리와 주석이 주성분이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구리 녹는 온도가 섭씨 1085도 라고 하니, 1000도가 넘는 용광로 같은 불길 속에 주저앉은 것이다.


녹아버린 동종의 잔해는 낙산사 의상기념관에 보존돼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일깨워주고 있다.

낙산사 화재로 불탄 동종의 잔해. 의상기념관 보존

20년이 지난 2025년 한여름.


낙산사를 찾은 순례자는 낙산사 저녁 타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낙산사의 저녁 타종 2025.8.12

역사의 끈질긴 생명력 덕분일까…낙산8경 가운데 첫 번째라는 ‘낙산사의 저녁 종소리(洛迦暮鐘,낙가모종)’를 직접 듣는 행운을 누렸다.


낙산사 동종 복원은 불교미술과 조각예술, 금속공예, 보존과학 전문가들이 팀을 꾸려 진행했고, 2006년 10월 16일 예전의 모습과 소리를 되찾아 중생 앞에 돌아왔다.

“적막했던 낙산사에 맑고 은은한 종소리가 살아났다. 대형 산불로 소실된 지 17개월 만이다.복원된 종의 외형은 원래의 동종과 거의 일치한다.…음향분석 결과 고유진동수는 177hz, 맥놀이 주기는 0.7초로 원래의 종과 약간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성분비와 두께 설계 등에 현대적 기술을 적용함으로써 생긴 미세한 차이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서울대 명예교수 나형용 박사는 복원된 종소리를 “맑고 깨끗하며 화음이 잘 어우러지는 좋은 소리”라고 평가했다.”

<한국일보, 낙산사 동종 복원 타종식…끊겼던 천년의 소리 새천년 향해 ‘뎅~’, 2006.10.17.>

낙산사 대성문과 칠층석탑 그리고 원통보전

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종소리 속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으로 향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바닷가 동굴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7일 기도를 올리자 관음보살 진신이 나타나 말했다. ‘네가 앉아 있는 산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날 것이다. 반드시 그곳에 불전을 지어야 한다.’ 그 말을 듣고 동굴에서 나오자, 과연 대나무가 땅으로부터 솟아났다. 곧 금당(金堂)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대나무가 없어지고 나서야 바로 관음의 진신이 머무른 곳임을 알았다.”<일연 지음,김원중 옮김,『삼국유사』,민음사,2008,pp.365-366>

낙산사 원통보전.화재 이후 2007년 복원됐다.

그 곳이 바로 현재 원통보전이 있는 자리라고 한다.


대화재 당시 원통보전도 폐허로 변했지만 2007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원통보전에는 보물(옛 499호)인 건칠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다.

낙산사 원통보전 내 건칠관음보살좌상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종이나 삼베를 입힌 뒤 반복적으로 칠을 해서 만든 불상이다. 불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데 2005년 대화재 때 얼마나 놀랐을까? 스님들과 신도들의 필사의 방어 노력으로 화마를 피했다고 한다.


원통보전을 나오니 칠층석탑과 담장이 눈에 들어온다.


화재 때 그을음 피해를 입은 보물(옛1362호) 칠층석탑도 반갑고 원통보전을 빙 두른 담장도 대견해 보인다.

낙산사 원통보전에서 바라본 칠층석탑과 담장

원통보전 담장은 3.7m 높이에 220m 길이로 조선세조가 1467년 낙산사를 고쳐지을 때 처음 쌓았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이 있는 원통보전과 칠층석탑의 공간을 ‘성역 공간’으로 구분 짓고 다른 건물과 분리하는 기능을 하지만, 차가운 단절보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소통을 느끼게 한다.


흙과 기와, 둥근 화강암을 사용했는데 정교하고도 치밀한 수학적 계산으로 담장을 쌓은 건지, 단순하면서도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무늬는 순례자의 눈을 정화시키는 매력을 담고 있다.

“자연과 인공이 소담스럽게 만나 편안함과 즐거움을 연출해낸 이 별무늬 담장에 나는 정말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그와 같은 디자인 발상에 존경이 가고, 그처럼 단출하면서 멋부린 태(態)가 없는 고고한 멋에 반한 것이다.”<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작과비평사,1993,p.211>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으로 가는 "꿈이 이루어 지는 길"

원통보전을 나와 대성문과 원통문을 지나 “꿈이 이루어지는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웅장한 모습의 해수관음상을 만나게 된다.

낙산사 해수관음상

높이 16m, 둘레 3.3m 최대너비 6m의 해수관음상은 1972년 제작을 시작해 1977년 11월 6일 점안했다고 한다. 화강암 700톤을 익산에서 운반해 와 300여 톤을 깎아내며 만든 대작이란다.


왼손에 감로수병을 받쳐 들고 홍련암 쪽 동해 바다를 바라보는 해수관음상.

이곳이 ‘관음 성지’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발길은 자연히 관음성지의 최초 사연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붉은 연꽃 위의 암자, 홍련암(紅蓮庵).

낙산사 홍련암

신라 문무왕 17년인 671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이곳에 온 의상 대사는 파랑새 한 마리가 해안 석굴 속으로 자취를 감춘 것에 의문을 품었다. 석굴 앞에서 7일 밤낮을 기도드렸는데 7일 후 바다 위에서 붉은 연꽃이 솟아나더니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고 한다.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곳에 세운 암자가 홍련암이다. 낙산사의 모태가 된다고 한다.

낙산사 홍련암 벽화

홍련암을 찾은 순례자들은 혹시나 파랑새를 볼 수 있을까 해안 석굴인 ‘관음굴’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하고, 300미터 떨어진 의상대에서 끝없는 동해 바다를 눈으로, 품으로 안기도 한다.

낙산사 의상대

대화재 이후 폐허를 딛고 2009년 복원을 마무리 해 예전의 활력을 회복한 낙산사.


관세음보살의 가피덕분일까?

문화재 발굴 조사와 전문가 자문을 종합해, 단원 김홍도 그림을 기본 모형으로 삼은 것이 전화위복이 됐다.


단원 김홍도(1745~1806)는 1788년 정조 대왕의 명을 받고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직접 유람하며 60폭의 실경 산수화를 그렸다.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이라는 화첩이다.

김홍도 낙산사도(출처:오마이뉴스)

화첩에 담긴 「낙산사도洛山寺圖」가 낙산사 복원의 조감도가 됐다.


덕분에 낙산사는 가장 크고 장엄했던 조선 세조 때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불타기 이전보다 더 원형에 가까워 졌다고 한다.


새로 회향한 낙산사는 홍련암의 주련처럼 언제나 활기찬 봄이고 여름일 것이다.

낙산사 홍련암 가는 길에서 바라 본 의상대

백의관음은 말없이 설법하시고 (白衣觀音無說說 백의관음무설설)

남순동자는 들은 바 없이 듣는다 (南巡童子不聞聞 남순동자불문문)

화병 위의 푸른 버들은 늘 여름이요 (甁上綠楊三際夏 병상녹양삼제하)

바위 앞 대나무는 어디나 봄이라네 (巖前翠竹十方春 암전취죽시방춘) ///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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