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 걸림 없는 사람은 생사의 번뇌를 벗어난다.”

[순례노트3-⑪]소요산 자재암과 원효대사

by 동욱

소요산 자재암 가는 길.

등산로 입구에 알 모양의 독특한 조형물이 서 있다.

소요산 등산로 입구 조형물

높이 3.2미터 폭 1.2미터로 동두천시가 도예인을 돕기 위해 다양한 도자기를 사들여 2011년 조성했다. 포토존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그런데 왜 알 모양이지? 이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한 가수 인순이의 노래 「거위의 꿈」에서 착안했나?

호기심에 찾아보니 “잘 보전되고 가꾸어진 소요산의 영원성과 생명의 재탄생, 순환을 상징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알 조형물을 뒤로하고 걷다보면 소요산 자재암이라고 쓴 일주문이 나오고 ‘경기소금강’이라는 현판도 눈에 들어온다.

소요산 자재암 일주문

“형상미의 극치를 보이듯 뾰족뾰족한 기암괴석이 절묘해 만물상을 연상케 하고 심연의 계곡은 오묘한 정취를 발산하며…봄엔 진달래와 철쭉이 장관을 이루고…가을 단풍은 봄철의 꽃 같다고 할 정도의 화려함으로 유명해 예로부터 경기의 소금강(금강산)으로 일컬어졌다.”<출처:동두천시>

자재암 일주문. 뒤쪽에 '경기소금강' 현판이 있다.

가을 풍광을 눈에 담으며 올라가는 데 얼굴 부분이 뚫려있는 스님과 여인 모습의 사진대가 보인다.


원효대사(617~686)와 요석공주의 모습이란다. 두 사람의 스토리로 관광객을 한사람이라도 더 모으려는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이 눈물겹다.

등산로 입구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포토존

‘자루 없는 도끼를 주면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어 보겠다’는 파계승(?) 원효의 노래. 그 노래를 들은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603~661)는 백제와의 전쟁으로 홀로된 딸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게 했다.


아들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가 용맹정진하는 원효를 바라보며 기도하기 위해 별궁을 지은 곳이 소요산 자재암 인근이란다.

등산로 입구에 있는 '요석공주별궁지' 사적비

그런데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을 데리고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요즘 찻길로 390km 떨어진 이곳 소요산에 정말 살았을까?


자재암 가는 길에는 원효굴과 원효폭포처럼 원효대사의 이름을 딴 장소가 잇따라 나온다. 요석공주를 상징하는 듯한 공주봉도 있다.

자재암 가는길에 만나는 원효폭포와 원효굴

“자재암은 654년(신라 무열왕1년)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자재암이라고 하였으며, 974년(고려광종 25년) 각규(覺圭)가 태상왕의 명으로 중창하였다.…『조선지지(朝鮮地誌)』에는 이곳에 요석궁(瑤石宮)의 옛터가 있다고 했다.…자재암이라는 사명(寺名)을 갖게 된 것은, 원효가 관음보살이 변신한 아리따운 여인의 유혹을 설법을 통해서 물리친 후, 다음날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고 무애자재인(無碍自在人)을 상징하며 자재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애자재인(無碍自在人).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현상에 걸림 없이 자유로운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뜻이다.

원효대사가 용맹정진했다는 원효대

원효대사는『화엄경』제13권에 나오는 “일체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의 번뇌에서 벗어난다(一切無礙人,一道出生死).”는 구절에서 따 이름을 무애라 했다고 한다.


“원효의 무애행과 파계의 시점이 태종무열왕과 요석공주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원효의 무애행 시점은 654년에서 661년 사이가 된다.”<김도공,「원효의 수행체계 연구-대승기신론소를 중심으로」, 원광대 박사논문,2001,p.15.>

산신각에서 본 자재암 모습

원효가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부르며 거침없는 ‘무애행’으로 불교 전파에 나선 건 당시 시대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삼국 사이의 전쟁으로 전사자와 유가족이 늘고 빈민층이 증가하면서 사회적 혼란 상황이 지속됐다. 불교는 여전히 왕실과 지배세력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비판과 반발이 터져 나왔다.

소요산 자재암

원효는 귀족 중심이었던 불교를 중생 속으로 깊숙이 확산시켰다. ‘사회적 약자’를 계몽하고 구제하는 데 크게 기여한 실천 불교의 대가였다.


“원효는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교화시키고 읊다가 돌아왔다. 그래서 뽕나무 농사짓는 늙은이나 옹기장이, 무지몽매한 원숭이 같은 무리에게도 모두 불타의 이름을 알리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했으니, 원효의 교화가 컸다고 할 수 있다.”<일연,김원중 옮김, 『삼국유사』,민음사,2025,p.483>

자재암 나한전 앞 석등과 청량폭포

원효대사가 수행했다는 원효대를 지나 자재암에 이르면 보기에도 시원한 청량폭포가 순례자를 반긴다. 원효가 수행했을 법한 토굴은 나한전으로 차려져 있다.

소요산 자재암 나한전

그런데 바로 옆에 원효샘이?


물이 맑기로 유명하다는 팻말도 서 있다. 원효대사는 물과 관련된 사연이 많은 분 아닌가? 그래서 맑은 물(?)에 더 집착하셨나?

자재암 나한전 앞 원효샘

원효의 해골물 설화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쉽게 납득되지는 않는다. 시신 썩은 물을 잠결에 무슨 이온음료처럼 마셨다는데 아무리 갈증이 심해도 입으로, 목으로 넘기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만 그 물을 마시면 몸이 먼저 반응했을 텐데….

자재암 원효샘 앞 석등과 청량폭포

이런 저런 의구심에 자료를 찾아보니 학자들의 견해도 비슷한 듯 했다. 해골물 설화는 원효 사후에 극적으로 각색된 측면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문이 달린 흙막인 토감과 무덤 일화를 담은 중국 고대 문헌『송고승전(宋高僧傳)』내용이 개연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자재암에서 올라가는 산길

“의상과 원효가 한 뜻으로 유학하고자 하여 항구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해 바다를 넘으려 했다. 길을 가는 도중에 험한 비를 만나 길 곁 토감(土龕)사이에 은신해 비바람을 피하려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보니 오래된 무덤의 해골 옆이었다. 하늘에서는 비가 계속 내리고 땅은 진흙탕이어서, 한 치도 나아가기 어려워 머뭇거리며 무덤 벽에 기대어 있는데, 한밤중도 되지 않아 귀물(鬼物)이 문득 있어 괴이하였다. 원효가 탄식했다.

‘전에 잘 때는 토감이어도 편안하더니 이 밤에 머물려니 귀신의 고장으로 마구 나타나니, 곧

마음이 생기는 까닭에 여러 법이 생기고 (心生故種種法生 심생고종종법생),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과 무덤이 다르지 않네 (心滅故龕墳不二 심멸고감분불이)

이 세상 오직 마음뿐이고 모든 현상은 인식하기 나름이며(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마음 밖에 아무것도 없는데, 어찌 따로 도를 구하리.(心外無法 胡用別求 심외무법 호용별구)’라고 말한 뒤

당으로 가지 않겠다며 짐을 메고 신라로 돌아왔다.” <신연우,「더러움과 깨끗함을 모티프로 한 원효설화의 불교 사상적 이해」,『고전문학연구』, No.66, 2024.p.417>

원효대에서 바라 본 소요산 풍경

‘삼계유심(三界唯心)은『화엄경』의 구절이며, 만법유식(萬法唯識)은 유식학의 상용구이다. 또한 그때 깨달으면서 노래한 구절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유래한다.’<남동신,p.57>


원효 대사의 해골물 혹은 무덤 설화는 일심(一心)과 무애(無碍), 화쟁(和諍)이라는 그의 사상이 오롯이 녹아있는 훌륭한 작품인 셈이다.

원효대사 진영,일본 고잔지(高山寺)소장 (출처:공공누리)

왕과 공주와의 인연으로 대학자인 아들 설총을 본 원효대사. 스스로 파계를 통해 승속불이(僧俗不二)의 삶으로 보살행을 실천했다. 또 순수 국내파이지만 신라를 뛰어넘어 중국과 일본, 동아시아 불교 사상 발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대 사상가이기도 하다.


“원효는 각자의 현실적인 처지는 천차만별이지만 본질적으로 평등한 중생들의 내면적 각성을 촉구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이상사회, 즉 정토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서 “고통스런 현실 사회와 행복으로 가득 찬 이상 사회는 본래부터 마음의 문제였다(穢土淨國 本來一心).” 즉 행복은 물질적인 개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에 의해서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유심주의(唯心主義)라 하겠다.”<남동신,『원효의 발견』,사회평론아카데미,2022,pp.357~358>

자재암에서 공주봉 가는 등산로 풍경

“스스로 원효라 부른 것은 아마도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의미다. 원효라는 이름 역시 방언인데, 당시 사람들은 향언으로 새벽이라고 했다.”<일연,p.483>


새벽처럼 불교를 처음 빛나게 한 원효대사의 이름이 곳곳에 남아있는 소요산 자재암. 경치도 수려한 그곳에서 위인의 향기를 구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인 것 같다. ///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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