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이 오해한 빈곤과 출산사이의 관계
며칠 전, 한 목사님의 충격적인 주장을 접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본인의 교회에서 진행한 설교에서, 한국 청년들이 아이를 많이 낳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을 학대하거나 가난하게 만들면 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아이를 많이 낳게 하려고 가뜩이나 힘든 청년들을 가난하게 만들자는 것은 물론 황당한 주장이지만, 몇 년 전에 저는 그와 유사한 고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체 가난한 사람들은 왜 아이를 많이 낳느냐는 것이죠. 그리고 저는 책을 통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목사님은 성경에서 어거지로 오답을 찾아내셨지만, 이 책은 경제학자들이 썼습니다.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 더 합리적이다>는 책입니다.
책의 저자인 아비지트 배너지와 에스테르 뒤플로는 MIT에서 경제학을 강의하고 있는 경제학과 교수들입니다. 두 분이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는 분야는 개발경제학이라는 분야인데, 쉽게 말하면 빈곤국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인들을 연구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야, 생각보다 논쟁이 무척이나 치열합니다.
예컨대 윌리엄 이스털리 같은 경제학자는 해외 원조가 빈곤 퇴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소위 ‘원조 무용론’을 펴는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선진국에서 선의를 갖고 낡은 신발들을 왕창 기부해주면, 정작 그 나라의 신발 산업이 모두 망해버리게 되므로 자체적으로 산업 경쟁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죠. 반대로 제프리 삭스 같은 학자는 해외 원조가 없이는 개발도상국들이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식의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자생적 산업 경쟁력을 키우는 것도 절대빈곤을 탈출한 상태에서나 가능하다는 식이죠.
그런 수십 년 묵은 거시적이고 이념적인 논쟁을 벌이는 이들과 달리, 이 책의 저자들은 조금 다른 접근법을 취했습니다. 거시적으로 ‘원조가 옳냐, 그르냐’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원조 정책들(가령 말라리아 방지를 위한 모기장 지원)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느냐를 미시적으로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과학에서 흔히 사용되는 무작위 대조 실험 기법을 그대로 빌려와 경제학 정책에 적용하는 혁신적인 시도를 진행했고, 그네들이 관찰한 미시적 현상들을 심도 있게 책으로 풀어낸 것이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은 무척이나 다양한 분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두에 제시했던 ‘가난한 사람들은 왜 아이를 더 많이 낳을까?’라는, 언뜻 생각하기에 무척이나 비합리적인 현상도 그네들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밝혀내며 공짜로 백신 접종을 해준다는 것을 거절하는 이유라던가 엄청나게 비싼 이자율을 적용하는 고리대금업을 계속 이용하는 지극히 비합리적인 행동들도 모두 이유가 있음을 나름대로 설명해줍니다.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셈입니다. 일부를 인용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가난한 나라를 방문해 도심에서 교외로 이동하다 보면 곳곳에서 미완성 상태로 있는 주택을 많이 볼 수 있다. 지붕 없이 네 벽만 있는 집, 지붕은 있는데 창문이 없는 집, 벽 한두 개만 세워놓은 집, 지붕 위로 기둥이 돌출된 집, 페인트칠을 하다 만 집 등 그 형태도 다양하다. 하지만 작업을 하는 시멘트공이나 벽돌공은 보이지 않는다. 대개는 여러 달 째 공사가 중단된 주택이다. 모로코 탕헤르 지역에 새로 생긴 마을은 이런 미완성 주택이 대부분이라 오히려 깔끔하게 완공된 집들이 눈에 띈다. 집주인에게 왜 집을 짓다 말았느냐고 물으면 한결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이게 우리가 저축하는 방식이에요."
왜 이들이 이런 식으로 저축을 하냐면, 무척 놀랍게도 은행을 이용할 수가 없어서입니다.
저를 비롯해 평생 한국에 거주하던 분들은 잘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우리 돈으로 몇 천 원 정도의 금액만 입금된 상태로 지속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계좌를 유지하는 것은 은행 입장에서 이득보다 손실이 더 큽니다. 은행이 계좌에 대한 이자를 지급해주는 것은 그 예금을 다른 사람에게 대출해줌으로써 수익이 나기 때문인데, 몇 천 원 입금하는 사람 수십만 명의 거래비용을 감당해봤자 그 총액이 얼마 되지 않으니 개설해줘도 손해만 나는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한국의 어머님들이 하시는 계모임과 같은 것을 꾸려 목돈을 만들거나, 높은 대출이자를 부과하는 사채업자를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돈이 생길 때마다 집을 조금 짓고, 다시 돈이 생기면 조금 더 짓는 식으로 그네들 나름대로의 ‘저축’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대출 끼고 집 사서 따박따박 대출금을 갚아나가는 것과 유사한 현상인 거죠.
다시 원래의 물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런데 정말 목사님 말씀처럼, 가난해지면 자연스럽게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일까요? 책에 따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자들은 개발도상국의 빈민들이 아이를 많이 낳는 주된 이유를 대략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노동력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농사를 시킨다면 아동학대라며 난리가 나겠지만, 개발도상국들에서는 지금도 그게 꽤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당장 한국만 해도 노년층들의 유년기를 들어보면, 그런 노동을 하는 경우는 무척이나 흔했습니다. 특히 할머니들의 경우는 아예 학교도 못 다니면서 집안일하고, 밭일하면서 막내 동생들을 돌봤다는 식의 얘기가 많으니 개발도상국도 다들 과거 한국과 비슷한 겁니다. 아이를 낳을수록 입도 늘지만 일손도 늘어나니 아이는 많을수록, 특히나 여성에 비해 근력이 좋은 남성 자녀들은 많을수록 좋은 거죠. 그 아이들이 자라면 가정에서 가용할 수 있는 훌륭한 노동력이 되는 것이니까요.
근데 요즘 한국이 중학생 자녀들을 밭에 보내는 환경일까요? 아니면 여성의 사회적 진출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직업여성’과 같은 끔찍한 단어가 버젓이 통용되던 60-70년대처럼 남자 자녀를 낳을 때까지 ‘뽑기’를 계속해야만 하던 환경일까요. 유리천장이나 경력단절 등의 문제는 아직도 존재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진출이 불가능한 상황은 많이 해소가 됐고, 아이를 많이 낳아서 아동노동을 통한 가계소득 증가를 꾀하기에는 한국의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국의 청년들이 가난해지더라도, 구태여 개발도상국처럼 아이들을 많이 낳을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할 거라는 얘깁니다.
저자들이 꼽은 두 번째는 노후 보장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겠다는 신념을 가지면 번식탈락에 아주 적합한 인재겠지만, 부모님 세대만 해도 노부모들을 봉양하며 사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장성한 자녀가 노부모를 봉양하며 사는 것이 일종의 관습화 된 법률 같은 것이고, 부모나 자녀나 그걸 당연하게 여겼죠. 한국은 그러한 가치관이 수정되었지만, 다수의 개발도상국들은 지금도 과거 한국의 상황과 유사한 인식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을 전제하고 한 번 생각을 해봅시다. 여러분이 영아사망률이 높은 개발도상국에 살고 있습니다. 아이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다, 그 아이가 갑자기 사망하면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될까요? 노후자금을 모두 끌어다 비트코인에 투자했던 사람들과 비슷한 상황일 겁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아이를 많이 낳아야 영아 사망의 위험이 헷지(hedge)됩니다. 거기에 한 가지 유인이 더 생깁니다. 과거 한국에서 그랬듯, 교육 인프라가 나쁜 곳에서는 똘똘한 장남 하나 잘 키워서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 필요한데 자녀 중에 똘똘한 애가 하나도 없으면 말짱 꽝인 거죠. 그래서 매주 로또를 사듯, 계속 아이를 낳는 겁니다. 하나만 잘 걸리면 일가족이 먹고살 수 있으니 일단 무작정 질러놓고 보는 겁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멀쩡히 출산한 아이가 죽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부모 세대야 혹시나 아이가 돌을 못 넘기고 죽을까 봐 출생신고도 1년씩 늦게 하는 일이 빈번했지만, 요즘에 그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만 낳아도 별 탈 없으면 성인이 될 수 있으니까요. 아이가 죽을 위험을 헷지하기 위해 보험 삼아 여럿 낳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결혼한 자녀가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문화가 이미 사라졌습니다. 부모 세대도 그걸 알기에 각종 연금과 보험 등으로 노후를 대비하고, 자녀 세대도 부모를 봉양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자녀가 갖던 일종의 노후대비책으로서의 성격도 많이 희석됐습니다. 그렇기에 똘똘한 한 명 건지려고 얻어걸릴 때까지 애를 낳을 필요가 없고, 곤궁하긴 할지라도 국가의 복지로 인해 노년에 길바닥에 나앉아서 죽을 가능성은 많이 낮아졌습니다. (현 노년층이 아니라 추후 노년층이 될 지금의 중년, 청년층 얘기입니다) 그렇기에 한국의 청년들이 가난해진다고 하더라도, 차라리 노후대비를 하며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을 택하지 구태여 결혼해서 아이를 엄청나게 낳음으로써 노후를 보장받고자 하는 현상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청년들이 받는 고통이 부족해서 아이를 덜 낳는다는 식의 주장은 여러모로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망언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진짜 문제는 ‘결혼’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 것에 있지, 결혼한 부부들은 예전과 같이 아이를 낳고 있습니다. 그 둘이 같이 하나의 통계로 묶이니 마치 결혼하고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착시가 나타나는 것이죠. 정말 출산율을 높이길 원한다면, 청년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보단 왜 그들이 결혼을 그토록 회피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요? 목사님이 이 책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