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마멋 <건강격차> 서평
사람들은 대부분 명확히 구분되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무척 안타깝게도, 세상의 대부분은 그리 명확히 구분되어 분리(이를 이산(discrete)이라 한다) 되어있지 않다. 7가지 색으로 나뉘는 무지개도 사실은 무한한 색의 연속이고, 자명해 보이던 남성과 여성의 성별(gender) 구분도 다양한 성소수자들의 존재로 인해 연속선상의 개념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반례가 있다. 언뜻 생각하기엔 이산적인 개념 같지만, 실제로는 무척이나 연속적인 개념인 빈곤(poverty)이다.
흔히들 빈곤이라고 하면 이런 장면을 떠올리실 거다. 개발도상국의 어딘가에서 뼈만 남은 앙상한 아이가 처연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런 가슴 아픈 광경. 그런데 사실 빈곤 개념은 꼭 이런 절대적 빈곤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분도 분명 누군가보단 부유하지만, 누군가보단 빈곤한 상태에 있다. 이런 연속적인 부의 분포 사이에 존재하는 소득의 불평등을 상대적 빈곤이라고 한다.
가난하면 그냥 가난한 것이지, 구태여 이런 인식이 필요한 이유가 뭘까 궁금하신 분들도 계실 테다. 그런데 이를 ‘가난함’과 ‘가난하지 않음’의 임의적 구분이 아닌, 연속적인 소득불평등의 기준으로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 <건강격차>의 저자 마이클 마멋은 그 이유를 소득불평등에 의한 건강불평등에서 찾는다.
예컨대 영국의 대도시 글래스고의 경우를 살펴보자. 글래스고의 경우, 같은 도시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평균 수명이 20년가량 차이가 난다. 같은 도시 안에서 거주하는 영국인임에도 가장 가난한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보다 20년 정도 먼저 세상을 뜬다는 것이다. 무척 충격적이지만 어찌 납득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삼성병원 VIP 병실을 이용할 수 있는 이건희 회장과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이 지내는 쪽방촌 독거노인의 수명을 비교한다면 그 정도 차이가 날 수 있잖은가.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쪽방촌 노인과 이건희 회장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 역시 평균수명이 소득에 따라 차등적이더란 거다. 동네 작은 식당에서 일하는 김 씨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 씨가 더 오래 살고, 대기업에 다니는 박 씨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산다. 일부 가난한 계층만이 소득불평등의 여파를 몰빵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 경사면에 있는 모두가 크든 작든 그 영향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마이클 마멋, 아니 마이클 마멋 경은 역학(epidemiology)과 공중보건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이다. 특히나 그가 주목받는 것은 그가 주된 연구 분야로 삼은 ‘건강불평등’ 문제다. 그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 위원회’를 3년간 이끌었고, 그 활동을 통해 기념비적인 보고서인 〈한 세대 안에 격차 줄이기(Closing the Gap in a Generation)〉를 냈다. 그뿐인가? 영국의 공무원 건강조사를 통해 사회적 지위가 낮을수록 질병 위험이 높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혀냈고, 덕분에 직장에서의 지위가 올라갈수록 스트레스가 과중해진다는 낡은 주장은 기각됐다. 그런 그의 연구가 오롯이 녹아있는 책이 바로 <건강격차>다.
책은 꽤 다양한 건강불평등 요인들을 체계적이고 유머러스하게 설명해준다. 예컨대 교육 수준은 수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스웨덴은 유럽 국가 중 25세 남성의 기대여명(앞으로 남은 수명을 말한다)이 가장 높은 국가이지만, 스웨덴의 중졸 이하 학력 남성의 기대여명은 소련 붕괴 이후 경제가 박살난 동유럽 국가 대졸 남성보다 낮다. 복지천국 북유럽 국가라고 해도 저 정도의 편차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교육 수준에 따른 편차는 사회보장제도에 의해 줄어들 수 있어서, 동유럽 국가의 중졸 이하 남성들은 같은 국가의 대졸 남성보다 20년 먼저 사망하는데 비해 스웨덴은 학력에 따른 기대여명 편차가 5년 정도뿐이긴 하다. 바꿔 말하면 그런 곳에서도 교육 수준에 따라 수명이 차이가 난다는 얘기기 그 영향은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육 수준은 소득에 얼마나 영향을 받을까? 마멋 교수는 이를 가상의 네 아이들을 비교함으로써 쉽게 설명해준다. 아래의 도표가 바로 그 차이다.
원래 똑똑하게 태어난 알렉스와 베스는 22개월 시점에서 인지능력 점수가 높다. 약간 모자라게 태어난 클레어와 데비는 22개월 시점에서 인지능력 점수가 상대적으로 낮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클레어는 그 나이에 과외를 받을 수도 없었을 텐데 인지능력 점수가 상승해 베스를 따라잡고, 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베스는 인지능력 점수가 하락해 데비와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영향요인들은 직접 책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인지능력만이 추후의 학습 성과를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유아기의 비교이긴 하나 소득 수준에 따라 이미 인지능력 단계에서도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선진국의 경우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개발도상국에서는 교육이 곧 본인의 생명을 지키는 것에도 직결된다. 만약 한국에서 ‘성관계를 거부해서 아내를 때리는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현시점에서 그걸 남편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여성은 극히 희박하리라 생각한다. 왜냐면 한국은 절대다수의 여성이 중등교육 이상을 수료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말리나 에티오피아 같은 곳은 사정이 다르다.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여성의 반절 가량은, 성관계를 거부했을 경우에 남편이 본인을 구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서평을 위한 예시로 교육 얘기를 인용하긴 했지만 책이 교육 얘기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노동환경에 따른 건강, 고용 여건에 따른 건강, 노년기의 건강, 지역공동체의 응집성에 따른 건강, 불평등 전반에 대한 이론적 접근, 세계의 불평등 등 건강불평등에 관련된 거의 모든 얘기들이 다 등장한다. 더 대단한 것은 그렇게 언급되는 것들의 대부분에 실증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실업률이 높아지면 자살률이 증가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사회보장 지출이 증가하면 실업률이 높아져도 자살률이 상대적으로 더디게 증가한다는 것은 어떨까? 이론적 층위에서 철학의 차이를 들며 입만 터는 사람들과 달리, 마멋 교수는 명확한 수치를 제시한다. 동유럽 국가들은 1인당 사회보장 지출이 37달러 정도고, 실업률이 3% 증가할 때 자살률이 2%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서유럽 국가들은 1인당 사회보장 지출이 150달러 정도다. 이들 국가는 실업률이 3% 증가할 때 자살률이 1% 미만으로 증가했다. 복지병으로 자살률이 늘어난다는 공허한 주장은 근거가 없었다. 주제마다 이런 것들이 꽉꽉 눌러 담겨서 관련 전공을 하는 입장에서도 읽는 내내 감탄이 나왔다. 이게 대가의 실력이구나 싶어서.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멋 교수 입장에서야 ‘건강불평등’에만 관심이 있으니 더 그랬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가 경제학에 대해 악의적 폄하를 일삼는 것이 책을 읽는 내내 너무 짜증이 났다. 그의 주장대로 건강불평등은 부의 불평등에서 기인한다면, 마멋 교수의 입장에선 그 부의 불평등을 없애는 것이 최종적 목표일 테다. 그래서 그는 부의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며 피케티를 인용하고, 여러 이론가들의 주장을 차용하는데 그 과정에서는 그가 앞서 본인의 전공영역에서 보여줬던 꼼꼼함이 순식간에 증발된다. 그의 입장과 주장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어느 정도 이해는 갔지만, 이데올로기가 아닌 실증 근거를 통해 논증하겠다는 사람의 급격한 태도변화가 썩 유쾌하진 않았다. 당장 내가 공부하고 있는 약학 영역에서는 의약품에 대한 경제성평가를 진행하고 있는데, 생명을 경제적으로 평가하려는 시도들을 거의 악마적 행위라는 식으로 냉소하는 건 지나치지 않은가. 거기다 세계 수준으로의 무리한 확장은 비전공자 눈에도 엉성함이 지나쳐 보였다.
이런 흠결을 감안하더라도, 정말 무척이나 훌륭한 책이다. 최근에 화제가 됐던 고려대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마일드한 국내판 교양서라면, 마이클 마멋 교수의 <건강격차>는 세계 단위의 전공서 같은 책이다. 교양서로 입문을 하셨다면. 조금 더 발을 디뎌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개인적 평점은 ★★★★☆. 후반부의 무리한 논리 전개와 엉성함이 참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