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바머의 <산업사회와 그 미래>를 읽고
한국에 거주하는 일반적인 시민이 테러범이 쓴 글을 직접 읽을 기회는 무척 드물 것이다. 일단은 아랍어로 적혀있을 가능성이 큰 데다, 최근에 테러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면면을 볼 때 이들은 그저 테러를 수행할 뿐 그 행위의 근간이 되는 이념의 창안자라고 보긴 힘드니까. 그런데 그 드문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이 있다. 범행 대상이 주로 대학교수, 연구자, 항공사 직원 등임에 착안에 붙은 별명인 유나바머(Unabomber)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시어도어 카진스키(Theodore Kaczynski)다.
그의 테러 이력은 화려하다. 18년간 다양한 곳에서 테러를 자행함으로써 3명의 사망자, 23명의 부상자를 내면서도 수사기관은 그의 소재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고, 심지어는 테러범의 요구에 굴복해 그의 주장이 담긴 긴 선언문을 <워싱턴포스트>에 싣는 굴욕까지 당했다. 그러고도 검거에 실패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을 뻔했지만, <워싱턴포스트>에 공개된 글을 읽은 그의 친동생이 수사기관에 연락하며 그의 테러행위는 끝을 맞이했다. 이 자체로도 충분히 이슈가 될 일인데, 더 놀라운 건 그의 이력이다.
그는 20살에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24살에 미시간대학교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버클리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어 짧게나마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초창기에 수사기관에서 추정하던 것처럼 사회에 불만을 품은 저학력 남성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는 학력과 지위를 가진 엘리트였던 거다. 이런 사람이 폭탄테러를 저지르게 된 이유는 뭘까. 그게 너무 궁금해서 그의 저서인 <산업사회와 그 미래>(Industrial Society and Its Future)를 읽게 됐다.
카진스키가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발표했던 <산업사회와 그 미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부분은 그가 생각하는 당시 현대인의 사고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다. 두 번째 부분은 산업사회에 바탕을 둔 현대 사회의 변화 과정과 미래를 전망하는 부분이고,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앞의 두 내용에서 출발해 그가 내린 결론인 ‘산업사회 붕괴 운동’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앞의 두 부분은 무척 탁월하고 마지막 결론이 무척 이상한 책이다. 앞의 두 부분에 중점을 두고 차례대로 소개해볼까 한다.
카진스키가 생각하는 인간은 일종의 ‘목적 달성 기계’에 가깝다. 인간은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을 투입해서, 목표 달성이라는 결과를 얻는 데서 성취감을 느끼는 존재다. 굉장히 당연한 얘기 같은데,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목표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노력을 거의 들이지 않아도 달성할 수 있는 목표다. 가령 머리가 가려워 손을 이용해 머리를 긁는 행동은 특별히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이다. 해보면 알겠지만, 인간은 이런 목표를 달성한다고 해서 특별히 큰 성취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만큼 노력이 들어가지도 않고, 어려운 일도 아닌 정말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노력을 엄청나게 하더라도 결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다. 가령 올해 막 20대가 된 청년이 결혼 적령기인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 즈음에 서울 내에 자가소유를 하는 건 노력 여부와 무관하게 거의 달성할 수 없는 목표다. 노력을 투입해야 하는 인간도 이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기에, 목표 설정 자체만으로도 그 인간은 심각한 열패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세 번째는 노력을 상당히 기울이면 달성할 수 있는 목표다. 가령 2021년 기준 최저시급으로 계산한 월 급여가 182만 원 정도이니, 1년에 500만 원을 저축한다는 목표는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노력한다면 달성할 수는 있는 목표이다. 인간이 가장 큰 성취감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런 목표를 달성할 때다. 내가 충분히 노력을 기울여서 목표를 달성하는 쾌감. 문제는 이런 세 번째 유형에 해당하는 목표가 사회가 발전하며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카진스키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가령 과거 농촌을 생각해보자. 생존을 위한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 실온을 유지하는 것, 깨끗한 옷을 입는 것 따위의 목표는 모두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목표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일 잡초를 뽑고, 길쌈을 하고, 베를 짜고, 냇가에서 물을 길어오고, 산에 올라가서 땔감으로 쓸 나무를 패오고, 산나물을 뜯고, 사냥을 해야 했다. 하나라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면 목표 달성이 힘들 정도로 노력 투입이 많이 필요하기에, 인간은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것으로도 필요한 성취감의 다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산업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목표’로 변해버렸다. 기존의 인간들이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주된 통로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물론 현재도 이를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는 수단들은 있다. 실제로 개인에게 별다른 실익이 없지만 고갈된 성취감을 얻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있지 않은가. 저열하게는 가챠게임에서 가상 캐릭터 뽑기, 인터넷방송에 후원하고 스트리머에게 닉네임 불리기, 덕질하는 연예인을 위해 스밍총공하기 같은 것들이 해당할 테고 조금 더 우아하게는 예술품 감상, 창작 활동, 연구 따위가 있을 것이다. 연구자들은 인류 문명의 증진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더라도 왜 하필 ‘그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지는 절대 설명하지 못한다. 본인이 거기서 성취감을 느끼니까 하는 일이라서다. 카진스키는 이런 활동들을 대리 활동(Surrogate Activity)이라고 명명한다.
카진스키가 생각하기에 현대인의 심리적 불안, 사회문제 같은 건 ‘노력을 상당히 기울이면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사라져서다. 이를 해소하려고 다양한 대리 활동이 개발되었지만, 대리 활동으로도 성취감 획득에 실패한 사람들은 좌절감과 열패감을 느끼게 된다. 산업사회가 도래하며 인간은 기존의 생물학적으로 익숙한 시기에서 벗어나 성취감의 원천을 잃어버리고 불행 존재가 됐다. 그가 산업사회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근거 중 한 축은 이러한 인간의 특성 때문이다.
카진스키가 생각하는 산업사회의 또 다른 문제는 인간의 자율성이 심각할 정도로 훼손되고, 인간은 기술에 종속되어 여기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스마트폰을 생각해보자. 스마트폰의 개발 덕분에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도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됐고, 스마트폰을 매개로 할 수 있는 다양한 서비스(인터넷 접속, 게임, 스트리밍 등)도 개발됐다. 이 기술이 인류에게 혜택을 준 건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와 동시에 스마트폰에 종속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만약 누군가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선택을 한다고 해보자. 스마트폰 도입 초기에는 가능한 선택지였을지도 모르나, 현재를 살아가며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건 생존을 위한 일자리 확보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메신저 앱을 이용한 주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지고, 업무와 관련된 메일도 받아볼 수 없으며, 지도책의 생산이 실질적으로 중단된 현재에는 낯선 곳에 찾아가는 길을 찾을 방법도 없다. 예매, 결제, 심지어는 출입증까지 스마트폰을 활용하니 생활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스마트폰 같은 비교적 신기술만 그럴까? 키진스키가 책에서 예시로 드는 건 자동차다. 모두들 너무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활반경은 극도로 축소되고 심한 경우엔 기초적 생필품조차 확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생활권에서 삶을 영위하던 사람들도 자동차가 제공하는 압도적인 효율성으로 인해 이를 거부할 수 없고, 결국은 모두가 해당 기술에 종속되는 삶을 살게 된다. 카진스키는 이 자체가 산업사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효율성을 제공해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나중에는 기술에 종속되어 기술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문제가 되는 건, 기술에 대한 종속이 가속화될수록 인간의 자율성이 심각하게 침해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로에서 절대 역주행을 할 수 없다. 효율적인 교통 흐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 시점에서 어떤 것을 원하는지,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와는 철저히 유리된 규칙을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자동차를 타기로 했으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건데, 문제는 앞서 설명했듯 자동차를 탈지 말지에 대한 선택권이 애초에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효율적인 사회 발전을 위해 기술을 인간에게 맞추기보단, 인간이 기술에게 맞춰지는 일이 산업사회에서는 주욱 이어져 왔고 인간의 생활양식은 점점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형태로 교정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이 이어지다 보면 최종적으로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모든 생활양식을 통제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게 카진스키의 결론이다. 황당한 인공지능 음모론처럼 들리겠지만, 카진스키의 생각은 스카이넷이 세계전쟁을 일으키는 <터미네이터> 같은 영화랑은 전혀 다르다.
카진스키는 말한다. 그 어떤 인간도 인공지능에게 모든 권한을 내어주지 않을 것이고, 그 어떤 인공지능도 인간에게서 그런 권리를 탈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렇지만 바둑에서 최선의 수를 찾기 위해 인공지능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점차 사회의 주요 결정들은 조금씩 인공지능에게 위임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인간의 지능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들도 기계들이 효율적으로 내려주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가 도래하면 인간은 스마트폰없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인공지능이 없는 삶을 살 수 없다. 철저한 종속과 자율성의 박탈이 오지만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를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지 모르지만, 증기기관과 총포를 개발한 유럽 국가들이 나머지 세계를 식민지배 했던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효율성을 높이는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은 조선은 멸망했고, 그런 기술들을 미리 받아들여 체화시킨 일본은 인접국을 식민지로 삼는 제국으로 발전했다. 산업사회가 발전시키는 기술들은 사회의 효율성을 높이고, 이를 거부하는 사회는 몰락한다. 카진스키가 산업사회를 붕괴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는 산업사회 자체의 특성 때문이다. 인간은 산업사회에 진입하며 성취감을 상실하고 불행해졌는데, 나중에는 산업사회의 특성상 자율성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가 카진스키가 폭탄 테러를 벌이게 된 주된 이유이자, 개인적으로는 썩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었는데 카진스키는 산업사회의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못 박는다. 이 부분에서는 논리도 상대적으로 엉성해지는데, 그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개혁을 요구하는 좌파 세력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아닐까 생각된다. 실제로 <산업사회와 그 미래>의 첫 부분을 비롯해 상당 부분은 좌파 세력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부분만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카진스키가 생각하기에 좌파 세력은 정신적으로 병든 환자들이다. 앞서 설명했던 카진스키의 인간관을 다시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텐데, 카진스키가 보기에 인간은 ‘적당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목표’를 통해 성취감을 얻는 존재다. 그런데 산업사회가 그 성취감을 앗아가자, 사람들은 열패감과 좌절감에 빠지게 되는데 그래서 나타나는 게 사회의 각종 폭력 사건, 마약 복용, 인종갈등 등의 병폐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좌절감과 열패감을 표출하지 않는 집단이 있으니, 그게 바로 좌파 세력이라는 것이다.
카진스키의 표현을 빌리면, 산업사회는 인간을 끊임없이 사회화시킨다. 기술에 대한 순응은 물론이고 체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본능을 억제하고 규칙을 준수하는 자세를 지속적으로 주입하는 것이다. 산업사회에 적합한 윤리관(나태하지 말라, 남을 적대시하지 말라 등)을 만들어서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교육하다 보니, 그중 일부는 과도하게 사회화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특정인에 대한 분노가 생겨도 이를 인정하고 화를 내기보단, 스스로 체화한 윤리(사람을 적대시하면 안 된다)에 기반해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정당한’ 화풀이 감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게 카진스키가 생각하는 좌파다.
사회 변혁을 유도하고자 하는 이들이 이 모양이니, 카진스키는 이들 세력이 절대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단언한다. 사회 전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특정 부분을 바꾸기 위해 운동을 벌이더라도 (애초에 좌파 세력은 운동의 동기가 잘못된 데다) 그 부분과 연결된 사회의 다른 부분이 변화하지 않으므로 다시 원래 추세로 회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사회를 개선 시키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혁명적 변화가 필수적이고, 이를 위해서는 산업사회에 지속적인 균열을 만들고 산업사회의 붕괴 당위성을 설파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산업사회가 혁명적으로 붕괴한다는 것이다.
이게 정확히 그가 과학자들, 대학교에 폭탄테러를 한 이유이다. 산업사회를 유지-심화시키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이들이 그들인데, 실제로는 산업사회 자체의 한계로 인해 기술이 얼마나 발전한들 인간의 자율성과 성취감은 회복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연구’에 종사하는 이유 자체도 성취감을 얻기 위한 대리 행위의 결과이니, 이들의 순수성을 항변하는 건 의미가 없다. 폭탄테러로 기술 발전을 지체시키고, 사회에 산업사회 붕괴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혁명을 기획했던 거다.
책의 앞 두 부분은 매우 탁월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성취감이고, 산업사회가 발전할수록 인간은 기술에 종속되어 그 기술이 없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은 반박하기 힘든 진실 아닌가. 그런데 한 끼 식사를 위해 하루 종일 밭일을 하고, 생존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는 게 과연 행복한 삶일지 좀 의문이다. 그런 사회라면 평범한 사람도 일상을 영위하는 것만으로도 큰 성취감을 누릴 수 있겠지만, 정말 인간은 현대에서 더 불행해졌을까.
카진스키는 원천적인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 인간이 대안으로 찾아낸 대리 행위들을 바짝 날을 세워 비판했지만, 우리는 현재 그 행위를 자아성취라고 부르고 있다. 과거에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행위를 해야만 얻을 수 있던 성취감을, 지금은 생존에 무관한 일을 고도의 자율성을 갖고 골라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닌가. 가령 현대인이 가챠게임 뽑기에 실패해서 좌절감과 열패감을 느낄지언정, 사냥에 실패해 며칠을 굶게 되는 고대인보다는 훨씬 삶의 만족도가 높을 거다. 오로지 성취감만을 위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리 행위를 만들어내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업종이 생긴 것 아닌가.
교통 신호를 준수해야 하는 자율성의 상실이, 이동에 자동차를 필수적으로 이용해야만 하는 기술에의 종속이 발생하긴 했지만, 사실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지역의 범위라는 것도 이족보행이라는 타고난 기술에 의해 발생하는 한계였다. 그 한계치가 넓어져 실질적으로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넓어지는 자율성을 얻는 대신 빨간불에 멈춰야 한다는 자율성의 상실이 그리 가슴 아픈 인류의 퇴보일지 좀 의문이다. 자연주의-탈기술문명에 대한 막연한 선호와 좌파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가진 인간이 지나치게 뛰어난 지능을 갖고 태어나 자신의 선호에 맞는 세계관을 창조한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