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를 읽고
본격적인 글에 앞서 이 책을 펼치게 된 연원을 간략히 짚어봐야 할 듯싶다. 간혹 서점에서 아무런 책이나 맥락 없이 집어 들게 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책 좀 읽었다 하는 사람들은 다음 책을 고르는 데 나름의 팁이 있다. 책에서 저자가 본문에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책이나 각주 등으로 인용하는 책 혹은 그 책에 대한 누군가의 서평에서 언급되는 책을 고르는 것이다. 본인 책을 쓸 정도의 사람은 유관 분야의 양서를 섭렵했을 개연성이 높고, 이에 대한 서평을 쓰는 사람도 비슷한 수준의 독서력은 갖추고 있을 테니 실패할 가능성이 작기 때문.
최근 내 관심 주제 중 하나는 산업의 기계화/탈인간화인데, 시작은 <제2의 기계시대>와 <현대자동차에는 한국노사관계가 있다>였으나 점차 암울하고 끔찍한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니 <산업사회와 그 미래>까지 도달해버렸다. 주변인들에게 카진스키의 광기와 탁월함을 설파하고 다니다 보니 이쪽 분야의 고전인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를 추천받게 되었는데, 읽어보니 추천 주신 이유를 너무 잘 알겠더라. 세계는 분명 맥도날드화(Macdonaldization) 되었고, 맥도날드화되고 있다. 그런데 대체 왜 뜬금없이 패스트푸드점인 맥도날드를 가져왔을까?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는 1993년에 나온 책이다.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 첫해를 맞이했던 해이며, 한국에서는 군사정권이 종결되고 김영삼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했다. 유럽에선 유럽연합이 처음으로 결성됐고, 한국에서는 그해 처음으로 수능이 실시됐다. 대충 그 정도로 오래전에 나온 책인데, 그즈음에 동시에 일어난 일이 바로 맥도날드가 만들어낸 특유의 시스템의 세계화였다. 그래서 ‘맥도날드화라’는 이름이 붙은 건데, 저자 본인은 거기에 아주 큰 프라이드를 느끼는 건지 책의 모든 개념어에 맥(Mc)이라는 단어를 붙여댄다. 만약 책이 지금 나왔더라면 애플사에서 초호화 변호인단으로 무지막지한 소송을 제기했으리라.
아무튼. 저자가 정의하는 맥도날드화란 이렇다.
1) 효율성(efficiency)
2) 계산가능성(calculability)
3)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
4) 통제(control)
이 네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사회 전반을 ‘맥도날드와 같이’ 바꾸고 있다는 게 저자의 핵심 주장인데, 저자는 이를 사회 곳곳의 혹은 산업 곳곳에서 발견해낸다. 산업이야 현재는 워낙 보편화 된 것이니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닌데, 충격적인 건 그 외의 영역이다. 가령 저자는 취미생활도 맥-취미(정말 모든 것에 맥을 붙인다)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예측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하던 게 핵심인 ‘캠핑’이 어느새 모든 캠핑장비를 갖추고 집과 같이 안락하게 즐기는 취미로 변화하고, 해외 곳곳을 직접 탐구하며 다녀야 하던 배낭여행은 효율적이고 계산가능하며 예측가능한 상품인 크루즈 관광으로 대체됐다. 사회의 맥도날드화가 진행된 거다.
책의 3/4 정도는 이런 맥도날드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분야에서 맥도날드화가 관찰되는지를 범주로 구분해서 상세히 논증하는 내용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영역부터 연륜 있는 교수로서 각지에서 수집한 풍부한 예시까지 분석 부분은 정말 흠잡기 힘들 정도로 충실한데, 문제는 가치판단 부분이다. 맥도날드화는 아무튼 잘못됐다. 왜냐고? 전통적인 사회가 유지하던 인간의 자율성(autonomy)을 침해하고, 가족을 해체하며,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분석은 실컷 잘 해두고도 이런 이상한 가치판단이 나오는 이유를 나는 도저히 납득 할 수가 없다. 도포 입고 호주제 폐지 반대 팻말을 든 영감들의 고집스러움이 느껴지는 “맥도날드화된 세계에서 태어난 이들은 이게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고까운 문장이 어디서 나왔을까?
인간성(humanity)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맥도날드화된 직장은 인간이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율성을 앗아가니 문제적이란 건데. <산업사회와 그 미래>와도 맞닿은 문제의식이지만, 기술 문명이 보편화되고 고도화될수록 그런 직업은 대체될 것이다. 기계화를 통해 사라져야 마땅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일자리가 남아있는 이유는 아직 인간이 기계보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카진스키처럼 화끈하게 폭탄테러로 원시사회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면, 이는 시대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 사이에 끼인 노인의 불평일 뿐이다.
우연히 아무 식당에 들어갔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끔찍한 수준의 식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차라리 맥도날드에서 식사하는 걸 선호한다. 식당 주인은 음식을 ‘창조적 열정’과 ‘자율성’을 갖고 만들겠지만, 그 ‘인간적’인 과정이 과연 늙은이의 자기만족 외에 무엇을 담보해주나. 이건 마우스 커서가 얼마나 부정확하고 느리게 움직여 체크박스를 누르는지 확인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인터넷상의 “로봇이 아닙니다” 테스트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방식으로 로봇이 아님을 증명해서 기쁘다면 좋겠으나, 체크박스를 누르는 업무 자체를 로봇에 위임하고 인간은 다른 창의적인 일을 하는 것이 더 ‘인간적’인 일 아닐까?
본인 글에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을 인용하는 사람은 제대로 되먹은 지식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또 하나의 확증편향 사례를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분석은 탁월하나 이상한 가치판단이 책의 가치를 매우 끌어내린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율적인 인간 행위인 독서를 맥도날드화해서 이 책을 계산 가능한 별점으로 치환하자면 ★★★☆다. 읽어봄 직은 하나 끝부분으로 갈수록 불쾌감이 높아지는 맥도날드 드라이브스루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