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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혀사장의 서고 Aug 15. 2018

그 많던 일본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잊혀진 역사,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본국 귀환기

 지금도 일본 사회에는 재일교포(자이니치)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숫자로는 대략 60만 명 정도.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곳에 자리를 잡은 이들이고, 해방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으로 돌아오는 대신 일본에 계속 거주하기로 결심을 한 이들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으시는가? 식민지기의 제국과 식민지는 일방향적 교류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든 싫든 양방향적 교류를 할 수밖에 없다.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생존한 이들이 60만 명 정도라면,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도 못해도 그 정도는 되었을 텐데 해방 이후 그 많던 일본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불행하고 비참한 과정을 담은 책이 바로 이연식 저, <조선을 떠나며>다.



 개인적으로 현행 한국 국사교육에서는 입체적인 일제강점기 시기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 책은 분명히 존재함에도 가르치지 않던 그 시기의 역사의 일면을 담고 있다. 사실 평균적인 한국인에게 ‘일제강점기’라는 단어는 그저 식민지 시기의 수탈, 특히나 전쟁 말기의 수탈만을 떠올리게 할 뿐이잖은가. 애초에 현행 국사교육이 반일감정에 기반 한 민족주의 교육에 치중하고 있다 보니, 그 맥락에서 서술되기에는 굉장히 부적절한 이런 역사는 교육되지도 않고 얘기되지도 않는다. 이 책은 일본제국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직후, 조선에 거주 중이던 일본인들의 귀환을 다루고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히 있었을 사람들이지만, 다른 곳에서 딱히 들어보지 못한 역사. 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읽으시는 것이 나을 듯하고, 나는 책을 읽으며 느꼈던 점 몇 가지를 적어볼까 한다.  



 1. 제국의 통치 방식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점은, 일본제국이 전체주의-제국주의에 기반 한 통치를 어떻게 이어갔던가 하는 점. 책 자체가 일본인의 귀환 과정을 조망하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같이 곁들이고 있는데, 제국이 붕괴하면서 억지로 틀어막아놨던 계층/계급적 균열이 노출되는 과정은 꽤나 흥미로웠다. 기본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인적 구성은 일본인 상류계급과 하류계급, 조선인 상류계급과 하류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 간의 위계관계는 대략 이렇다. 일본인 > 조선인 양반 > 조선인 상민. 흔히들 ‘친일파’라 칭하는 재산께나 모은 조선인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들을 부리며 살았을 것 같지만, 사회적으로 조선인은 2등 국민에 불과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의 생활구역은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편이었다. 각종 근대적 편의시설이 갖추어지고, 조선인이라곤 양반/인텔리들 정도가 전부인 일본인 촌(村)과 그 외곽에 존재하는 초가가 즐비한 조선인 촌(村). 근대의 혜택을 받기보단 사실 조선이라는 전근대에 더 가깝고, 일본인들을 볼 일이라곤 일본인촌에 허드렛일을 하러 갔을 때가 거의 전부인 사람들. 같은 경성(京城)에 살았다고 하더라도, 조선인 상민들이 일본인들과 교류를 할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교류하던 조선인이라곤 근대적 교양을 갖춘 양반이나 인텔리들이 전부라, 해방 이후에 거리를 점령한 조선인들을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고분고분 허드렛일을 하던 얌전한 인간들이자, 평소에는 인지 범위에도 없었던 사람들이 난폭하게 일본인들에게 폭력을 가하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지금으로 따지자면, 한국 땅에 있는 조선족들이 갑자기 봉기를 일으킨 그런 느낌일 테다. 식당에서 내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서빙이나 하던 아줌마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실질적 위협으로 돌변한다면 얼마나 공포스러웠겠나.   


 게다가 조선인들은 노동에서나 일반적인 서비스 이용에서도 일본인들에 비해 차별을 받았었다. 가령 기술직의 경우, 같은 기간을 근무한 노동자라고 해도 조선인에게는 기술을 전수받을 기회가 현격히 낮았으며 고급 기술을 익힌 조선 사람은 일본 사람의 1할에 불과했다고 한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창하며 조선인도 같은 황국신민이라는 선전을 열심히 해댔지만, 실상은 2등 국민이요 피식민 지배인에 불과했던 셈. 게다가 조선인은 사회적으로 이런저런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책에서 대표적으로 예로 드는 것은 ‘공중목욕탕’의 이용. 저자는 <탈출기>로 유명한 카프 작가 최서해의 <이중(二重)>을 얘기하며 조선인들이 겪었던 차별적 대우를 보여주는데, 난 이걸 또 eBook으로 구매해서 읽었다 -_-;;. 뭐튼 소설의 내용을 간략히 옮기자면 이렇다.(사실 두 쪽짜리라 요약할 것도 없긴 하다. 내 500원...)   


 일본인 촌으로 이사를 한 주인공 가족은 나름대로 만족을 하며 지내지만, 어느 날 극심한 분노를 느끼는 사건을 겪게 된다. 아내가 이웃 일본인 할머니와 같이 목욕탕을 갔다가 ‘요보(ヨボ)'*는 목욕탕에 들일 수 없다며 쫓겨난 것. 이후에 사건이 지역에 소문이 나며, 이들 부부는 결국 집주인에게 퇴거하라는 말을 듣게 된다. 왜 이런 이중(二重)의 설움을 겪어야 하는가.


* 요보(ヨボ) : 당시 조선인에 대한 멸칭. 조센징이 당시에 멸칭으로 쓰였단 것은 후대의 창작이다. 


 일본 제국은 명백한 피지배 민족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일본인 개인의 성취와 일본인 사이에 존재하는 계층/계급적 차이를 뭉개고, 당대 일본인들에게 우월한 단일 집단이라는 망상을 심어서 성공적으로 이런 균열을 은폐했었다. 제국의 성취는 곧 일본 국민들의 성취이며, 피지배 민족인 조선인의 존재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명징한 전리품 이잖은가. 그런데 이런 착시는, 제국의 성취란 게 계속 지속되어야만 가능한 외발 자전거 묘기에 가깝다. 멈추는 순간 넘어지게 되고, 가까스로 붙들어둔 균열이 삐져나오면 그때는 정말 끝이니까. 그래서 제국은 지속적인 영토 확장 정책을 택했고,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지 않았을 까란 생각이 든다.   



 2. 차별의 정당화 과정  



 위에서도 언급했듯, 조선인은 각종 사회적 차별에 시달렸었지만 거기도 나름의 이유가 존재했었다. 저자도 책에서 서술하길, 당국의 제제조치에도 일본 목욕탕 주인들이 조선인들의 입욕을 막았던 것에는 나름의 정당성이 존재했으니까. 당대의 ‘요보’들은 ‘불결함’의 걸어 다니는 표본이었고, 이런 사람들을 욕탕에 들였다가는 일본인 손님들이 끊기는 것이 자명한 일 아닌가. 그래서 단속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에 대한 입욕금지는 쉬이 풀리지를 않았었다. 사실 요즈음에도 지나치게 불결해 보이는 사람은 목욕탕 입장을 막지 않나. 음식점들도 식대를 떼일 것 같은 사람의 입장을 막는데, 현실적으로 저 정도의 건을 두고 ‘근거가 없는 차별’이라고 하긴 조금 곤란할 듯하다. 실제로 당시 조선인들의 대부분이 위생상태가 좋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걸 보다 보니, 왠지 모르게 ‘차별’을 정당화하는 방식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일제 강점기 초반 즈음에 솔직히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어마 무시한 차이가 존재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인데, 식민지배 중후반에는 ‘요보’라는 명확한 계층이 나타나게 됐잖은가. 처음엔 단순한 민족 간 ‘구분 짓기’에서 시작한 것이, 근거를 획득한 정당화된 차별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있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미국 흑인이 그러했듯, 계층/계급적 차이에서 기인한 ‘편견’들이 인종의 모습을 띠게 된 것 아니겠나 싶더라고.   


 최초에는 조선인 상민들이나 일본인 하층계급이나 큰 차이는 없었을 테다. 그러나 ‘구분 짓기’에 기반 한 여타의 차별이 선행되며, 이러한 차별은 각종 합리적인 근거들을 획득하게 된다. 근대적 편의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고, 국가가 주관하는 공교육의 혜택에 있어서도 일본인과 차별을 받았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두 집단 간의 ‘근대 교양’과 ‘학문적 소양’에서는 격차가 점차 커졌을 테니까. 그런 방식으로 일본인의 여집합으로 존재하던 조선인은 무식하고 교양 없는 ‘요보’가 됐을 거고, 그네들이 가진 특질은 근대 사회에선 당연히 배격당할 특징일 테니, 그들에 대한 차별은 지극히 정당화된다. 그렇게 정당화된 차별은 고착화되어서 인종적 편견으로 굳어지고, 소위 ‘열등한 민족’이 되어버린 조선인들은 차별의 근거를 계속 획득하는 악순환에 빠지지 않았을까. 곧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입할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도록 꽤 세심한 조치를 취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자스민 의원도 임기가 끝난 판에 과연 누가 그쪽을 신경이나 쓸지 모르겠다.    



 3. 일본인의 ‘피해자론’에 대한 반박  



 사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마지막 몇 챕터였다고 생각한다. 책이 보여주는 일련의 일본인 탈출 과정을 보면, 정말 눈물겹다고 밖에 할 수가 없더라고. 남한의 경우야 미군정과 독립투쟁 세력들이 세운 방향에 따라 비교적 원활하게 귀국하게 됐지만(자세한 과정을 책을 참고 하시라), 소군정이 자리 잡은 북한의 경우는 정말 처참한 상황을 맞이했었다. 소련군의 경우, 2차 대전에서 독일군과 맞붙으며 얻은 상처뿐인 승리를 벌충하기엔 여타의 물자나 노동력이 매우 부족한 상태였기에 군에게 ‘현지 조달’을 명령했었다. 소련군은 북한 지역에 진입하자마자 무지막지한 약탈과 함께 일본인 부녀자에 대한 겁탈을 자행했고, 일부는 이 여파로 인해 일본 본토에 귀국하여 혼혈아를 낳기도 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일본 여성들은 겁탈을 막기 위해서 머리를 빡빡 깎았고, 지역 일본인회에서는 양숙한 처자들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소련군 위안부를 조직하기도 했다. 당연히 금붙이를 비롯한 각종 패물도 빼앗겼으며, 이는 수입이 끊기고 이동을 제한당한 북한 지역의 일본인들에게 막대한 타격이 됐다.  


 게다가 소련 정부에서는 북한 지역에 거주 중이던 일본인들을 ‘훌륭한 노동력’으로 파악했다. 미국의 경우 일본을 전쟁불능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기에 남한지역에 거주 중인 일본인들의 귀환에 서둘렀지만, 소련 입장에선 귀중한 노동력을 내보낼 수 없으니 차근차근 남성들을 징집해서 꽤 많은 수를 러시아로 보내버렸다. 그렇게 집안의 성인 남성이 사라지고, 부녀자와 노약자만 남은 상황에서 패전 후 전환기를 버텨내기가 여간 일이 아니었을 테다. 그나마 잔류한 남성들도 일본인 기업들이 조선인에게 접수되며 실직 상태로 돌아섰으니 상황이 좋을 리가. 그렇게 그들은 지옥 같은 수준의 삶으로 추락해서 몇 년을 버티다, 겨우 탈출해서 본국에 갔다.   


 그네들의 문제는 본국에서도 지속됐다. 전쟁 전에는 제국의 역군으로서 해외로 나가는 일본인들을 장려했던 국가지만, 패전 후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진 상황에서 국가는 그네들을 외면했다. 친척집을 찾은 곳은 그나마 나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인 수용소에서 집단생활을 버텨야만 했다. 위에서 언급했던 제국의 카스트 원리는 그네들에게 똑같이 작동해서, 하층민으로 전락한 그네들은 인양자(引揚者, 히키아게샤)란 이름의 2등 국민이 되어버렸다. 그네들이 식민지배 ‘가해자’로서의 인식보단, ‘피해자’로서의 인식을 갖기 더 쉬운 환경이었단 것.  


 더군다나 일본 정부는 전후에 자국민에 대한 보상 문제에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승전국에 대한 전쟁배상금은 물론이거니와 전몰자, 인양자, 폭격 피해자 등에 대한 정부 배상금도 만만찮은 수준이었으니까. 위대하신 박정희 각하께선 아예 헌법에 이중배상 금지를 넣는 엄청난 방법으로 국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소멸시켜버리셨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우리 모두는 전쟁 피해자’라는 논리로 책임을 종식시켜버렸달까.   


 소위 ‘평화 이데올로기’로 대표되는 전후 일본의 사조에는 이런 사정이 깔려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데, 조금 더 부연하자면 이렇다. 일본인 모두는 패권주의적 제국주의와 전쟁의 피해자이니, 그런 이념을 극구 배격해야 된다는 식. 맞는 말이기는 한데, 이렇게 가면 약간 이상해진다. 일본인들이 모두 전쟁 피해자이면 도대체 ‘가해자’는 누구이며, 제국의 국민으로서 입은 전쟁 피해와 식민지배국 국민으로서 입은 전쟁 피해가 등치 될 수는 없지 않나. 게다가 좀 특이한 형식이긴 했지만, 당시 일본제국은 엄연히 제국의회가 구성된 입헌군주국이었다. 선거를 통해 국민들이 제국의회 구성원들을 뽑았었는데, 단순히 전범 일부에게만 책임을 몰빵 한다는 것이 가능할지 좀 의문이다.   


 물론 저자께서도 저런 탈출 서사를 겪은 이들이 피해자론에 함몰되는 것이 그리 이례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성찰의 부족이라 힐난하기엔, 일반적인 사람들의 자기중심적 서사란 게 당시 일본인들에게 유별난 것은 아니잖은가. 이러한 기저의 인식차가 있다 보니, 현세대의 일본인들이 식민지배에 대해서 현재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께서도 책에서 그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인식차가 생긴 원인을 인지하고 새로운 대화를 모색하는 것에 주안점이 있다고 하셨으니까. 나 같은 비전공자로서는 한쪽의 사료만 읽는다면 매몰되기 쉬웠을 텐데, 일본인들의 수기를 폭넓게 인용하면서도 당시 시대상과 해당 기록의 실제적 의미를 교차적으로 검증해주셔서 참 좋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별점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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