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에피쿠로스의 4가지 처방
에피쿠로스는 나이에 상관없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신건강을 추구하는 데 있어 철학만큼 도움 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차분한 평정심에 이르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과정으로서 욕망의 좌절과 미래에 대한 염려라는 2가지 위험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추가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세계의 작동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함을 알려준다. 그러기 위해 이성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사고를 배워야 함을 강조한다.
철학에 어느 정도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에피쿠로스 하면 무엇이 떠오르냐고 질문하면 대개 쾌락주의를 떠올린다. 물론 에피쿠로스가 쾌락을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제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제시한 쾌락은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육체적 쾌락이나 무언가 행동함으로써 생기는 쾌락이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대한 오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쾌락과 에피쿠로스가 제시한 쾌락 간의 차이점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에피쿠로스가 제시한 쾌락은 무엇을 의미할까? 쾌락은 어떤 행위에서 발생하는 동적인 쾌락과 그저 어떤 상태, 존재에 이르러 생기는 정적인 쾌락으로 나뉜다. 쉽게 예를 들어 밥을 먹지 못해 허기진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배를 채우기 위해 밥을 먹는 행위를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쾌락을 동적인 쾌락이라 한다. 식사 후 이 사람은 배고픔의 상태로부터 벗어났고 여기서 생긴 쾌락을 정적인 쾌락이라 한다. 물론 먹는 과정도 즐거울 수 있지만 에피쿠로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목적은 먹는 행위가 아닌 배고픔이라는 고통으로부터의 탈피다. 그는 배고픔이라는 고통으로 벗어난 상태 자체가 쾌락이라고 주장하며 인간의 상태가 쾌락과 고통으로 나뉘어 반드시 둘 중 하나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또한, 쾌락의 추구에는 정적인 쾌락이라는 명확한 한계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정적인 쾌락에 도달한 이후의 동적인 쾌락은 더 이상의 효과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배부른 상태에 도달한 이후에도 밥을 먹는 행위를 이어나가면 오히려 탈이 나는 역효과를 발생시키지 않는가. 물론 다양한 음식을 통해 행복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는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쾌락에 비할 수 없다. 즉, 에피쿠로스는 추위, 배고픔, 아픔 등의 고통이 없는 상태가 쾌락을 의미하며 그 상태에 이르기 위해 그리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도달하는 삶을 목표로 한다.
지금까지는 육체적인 쾌락의 동적, 정적인 측면에 대해 다뤘다. 에피쿠로스도 이런 육체적 쾌락이 삶의 기반이 된다고 인정했지만 그가 실제로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은 정신적 측면이다. 배고픔은 일시적이지만 고통과 불안 같은 정신적 측면은 영구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까닭에서였다. 또한, 실제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정신적 측면이 강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미래에 발생할 육체적 두려움을 현재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반대로 생각하면 정신적 측면에서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주장을 토대로 에피쿠로스의 쾌락을 분류하자면 동적인 육체적 쾌락, 정적인 육체적 쾌락, 동적인 정신적 쾌락, 정적인 정신적 쾌락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이 4가지 쾌락 중 정적인 정신적 쾌락 즉, 정신적으로 아무런 고통과 불안이 없는 상태를 중요시한다. 이 상태를 '아타락시아'라고 부르는데 '평정'이라는 뜻이다. 에피쿠로스는 정신적 쾌락을 통해 육체적 고통을 상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육체적 쾌락보다 정신적 삶의 내적 작용을 우선시했다.
또한, 육체적 고통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며 고통을 2가지로 분류했다. 대부분의 고통은 격렬하지만 지속되지 않는 고통과 약하게 지속되는 고통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곧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후자는 버틸만하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말한다. 간혹 격렬하게 지속되는 고통이 발생하는데 어차피 죽으면 고통은 사라지고 실제로 그런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대부분의 육체적 고통은 정신적 쾌락 앞에 먼지가 되어 사라질 뿐이다.
쾌락은 오히려 맑은 정신으로 심사숙고한 결과라네. 모든 선택과 거부 행위의 동기를 분석하고, 정신적 동요의 주된 원인인 신과 죽음에 관한 거짓 관념을 버리는 것이지.
이 문제 그리고 이와 관련된 내용을 혼자서 혹은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 밤낮으로 생각해 보게. 그러면 잠들어서든 깨어서든 다시는 불안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인간들 사이에서 신처럼 살아갈 수 있을 걸세.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中」
당신은 행복을 느끼기 위해 무엇이 어느 정도 필요한가?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들은 사람들마다 달라 주관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공통점이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상태를 욕망하고 그 과정에서 불행해진다는 사실이다.
에피쿠로스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남긴다. 우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3가지로 나눈다.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것, 자연스럽지만 불필요한 것, 마지막으로 자연스럽지도 않고 불필요한 것이다.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것으로 먹을거리가 있고, 몸을 피할 수 있는 보금자리 등을 제시하며 이외의 것들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런 불필요한 것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동요가 발생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이 없으며, 반대로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을 손에 넣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쓸모없는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의 한계를 규정지으면서도 그렇다고 욕망을 너무 억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언제나 물과 빵만을 먹으며 생활할 수는 없다. 가끔은 레스토랑에 가서 고급 요리를 먹을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을 대하는 태도이다. 그는 필수적인 것으로만 구성된 평범한 삶을 살아가며 종종 불필요한 쾌락을 즐길 때에는 그 행운에 감사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정신적 고통이 없는 단순한 삶을 영위하며 때때로 필요한 것 이상을 얻었을 때는 감사하며 주변과 나눌 수 있는 삶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 가족, 동반자 같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정원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철학을 공유한 모습으로부터 에피쿠로스 역시 이런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행복한 삶을 위해 그다지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음에도 타인의 존재와 역할은 중요하다 보았던 것이다. 그가 주목한 친구의 중요한 특성은 바로 어려울 때 의지가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도움이 되진 않더라도 적어도 어려울 때 곁에 있으리라는 믿음이 정말 중요하다고 보았다.
다만 주의할 점은 일방적인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물론 친구와의 주고받는 관계에서 오차가 1도 없이 계산적일 수는 없겠지만 관계는 항상 상호적인 특성을 띄고 있어야 한다. 상호원조는 물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내, 연민, 관심 등의 도의적 측면 또한 중요하다. 친구의 약점이나 결점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우리 또한 그렇게 대해지길 바라는 경향이 있다.
에피쿠로스는 정치 형태와 우정의 차이점을 언급하며 우정이 중요한 이유를 제시한다. 정치 형태는 사회계약론적인 측면이 강해서 공동체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경향이 있다. 공동체의 규약을 어겼을 대 처벌받을 것이라는 공포를 기반에 두고 있다. 반면, 우정은 상호 배려와 원조를 바탕으로 하여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돕는다. 즉, 우정은 개인의 불안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준다.
내 생각으론 요즘 우정의 형태도 마냥 에피쿠로스의 주장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것 같다. "내가 도움을 주고 배려해야 남들도 그럴 테니까"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점점 정치 형태와 유사하게 계약적인 측면도 생겨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우정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도움을 주었을 때 감사하게 여기고 상호원조를 줄만한 사람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본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우정의 중요성을 현대에 맞게, 그리고 나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에피쿠로스는 자연계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만큼 이론적 탐구에 단순히 손만 댄 정도가 아니라 수많은 학술적 저술을 하였다. 하지만 폼페이 화산 폭발로 인해 그의 저서인 '자연에 관하여' 37권 전부가 땅에 묻혔고 영영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다행히 18세기 중반 무렵 땅굴을 파다가 그의 저서를 발굴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대부분 훼손된 정도가 상당해 복원된 것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그중 에피쿠로스 철학의 정수를 담은 '네 가지 처방'이라는 글에서 그가 주장하는 바를 명확히 할 수 있다.
신을 두려워 마라.
죽음을 염려하지 마라.
좋은 것은 구하기 어렵지 않으며,
끔찍한 일은 견디기 어렵지 않다.
에피쿠로스가 제시하는 4가지 개념 중 3번째와 4번째 내용은 앞에서 다뤘기 때문에 나머지 2가지 개념을 배워볼까 하는데 이번 장에서는 "신을 두려워 마라"라는 글귀에 집중해 보자. 그가 자연계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도 이 글귀와 관련이 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두려움에 떨고 불안을 느끼는 이유도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이다. 내 앞의 상황을 과장하거나 편견을 가지지 않고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나의 행복 증진에 큰 도움이 된다.
에피쿠로스를 무신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생각하는 신의 개념이 일반인들과 다를 뿐 무신론자는 아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의 속성인 우릴 다스리고 책임지는 특성과 신이 자신의 평정을 추구하는 속성이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자의 특징을 부정한다. 그가 생각하는 신은 우리에게 관심 없는 채로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평정을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 무엇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생명체라면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텐데 굳이 고통과 불안을 가지는 일을 할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즉, 신이 나에게 무슨 벌을 내릴까 봐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혹여나 벌을 내려도 알량한 오지랖 때문일 테니.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미래의 죽음이라는 육체적 고통 때문에 현재를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어차피 죽는다면 감각은 사라지고 존재 또한 사라지기에 고통과 불안을 느낄 주체도 없다고 주장한다.
혹자는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기까지의 고통과 불안이 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앞 장에서 살펴본 바론 고통은 약하게 지속적으로, 또는 강렬하게 순간적으로 둘 중 하나로 존재한다. 양쪽 모두 그 나름대로 버틸만하며 혹여나 강하게 지속적이라면 앞 문단에서 밝힌 대로 죽으면 고통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또한, 이런 육체적 고통은 정신적 고통으로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어 정적인 정신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는 죽음을 피해 조금 더 살 수 있다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앞에서 언급했듯 정적인 쾌락이라는 한계점이 존재하고 이 이상은 양적으로 늘어난다 해도 충족되지 않는다. 종류가 다양해질 뿐 얻는 쾌락의 정도는 한계점 앞에서 일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죽음에 두려워 현재를 희생하기보단 오늘의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번 태어난다. 두 번 태어날 수 없으며 영원히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내일을 통제할 수 없는데도 내일을 위해 오늘의 기쁨을 미룬다. 인생은 그런 유예 속에 낭비되며, 결국 모두가 그렇게 일만 하다 죽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