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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allax Mar 17. 2020

흑백사진노트 20

폭풍전야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그 날이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일기예보에선 많은 비가 내릴 거라며 호우에 각별히 주의하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죠. 그날 아침 하늘을 보니 구름의 모양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몇몇의 동료와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오래간만에 만나기로 했는데 하늘을 보니 카메라가 필요할 것 같더군요. 그래서 오랜만에 중형 필름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나갔습니다.




90년대에 나온 중형 필름 카메라는 필름의 면적이 커서인지 카메라 부피가 좀 큽니다. 그래서 작은 가방에 넣으면 뭔가 거창한 물건을 넣은 것 마냥 두드러져 보입니다. 지하철에서 그렇게 두드러진 가방을 메고 있다가 올림픽공원 역을 나설 땐 카메라를 손에 쥐고 나섰습니다. 관광객도 많았고 운동하는 사람, 산책하는 개도 구름도 바람도 많았습니다. 동료들과 산책을 하며 틈틈이 풍경을 필름에 담았지만 별 감흥은 없었습니다.

 

6x4.5cm KODAK Portra 160 컬러 네거티브 중형 필름


어디선가 커플의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슨 말인지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억양과 어조로는 외국인이었고 다투는 것 같았습니다. 지나던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소리에 잠시 구경하다가는 이내 가던 길을 갔습니다. 잠깐 서서 보고 있자니 이내 조용해지면서 언제 다퉜느냐는 듯 서로의 기념사진을 찍어주며 다시 다정해지더군요.


60mm, F11, 1/60s, ISO 160, DNG 스캔 후 흑백 작업


다투다가도 이내 다정해지는 커플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신기하였습니다. 특히 그 커플이 계단 위에 서 있던 저를 보았지만 커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진 않고 서로의 독사진만 번갈아 찍던 모습도 기억나는군요. 폭풍을 몰고 올 듯한 그림 같은 구름과 단풍으로 가득한 근사한 배경에서 다툼 후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던 커플의 모습은 이내 평화로워졌습니다. 사진만으로는 이들이 다툼이 있었는지 곧 폭우가 내렸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한 때의 모습이, 이제 돌이켜보니 많은 일들의 전후 사정 속에 있었던 짧은 에피소드가 모여 연속된 시간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짧은 순간이 모여 다양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상의 시간이 다시금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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