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바뀌는 순간: 디자인의 관점 전환
디자인의 핵심은 눈에 보이는 기능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적 편익이다.
기술보다 사용자의 삶 전체를 이해할 때 비로소 디자인이 시작된다.
이러한 관점 전환은 ‘Easy to Live’는 삶 중심 디자인 철학으로 이어진다.
삼성에서 Galaxy S를 디자인하던 시절, 우리 팀이 가장 신경 쓴 것은 사용자가 처음 스마트폰을 접하는 그 ‘첫 순간’이었다. 그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들이 가장 힘들어한 것은 “버튼을 찾지 못하는 문제”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이걸 잘못 누르면 어떡하지?”
“내가 망가뜨리면 안 되는데…”
“다른 사람은 다 잘 쓰는데 나만 못하는 건 아닐까?”
이 작은 불안이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손끝을 굳어지게 했다. 버튼이 아무리 크고 메뉴가 아무리 단순해도, 이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으면 사용 경험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서 우리가 설계해야 했던 것은 “쉬운 인터페이스”가 아니라 “안심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우리는 접근을 바꾸었다. 절차를 줄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사용자가 매 단계에서 “잘하고 있습니다”, “이건 안전합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습니다”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되돌리기 버튼, 친근한 언어 톤, 실수해도 복구 가능한 구조 등이 그 해답이었다.
사용성 지표로는 측정되지 않는 요소들이었지만, 사용자의 삶에는 결정적인 의미를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미 그때, 사용자의 ‘과업’이 아니라 사용자의 ‘감정과 삶’을 디자인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 찾아온 첫 번째 Easy to Live의 실천이었다.
2016년, 나는 삼성전자를 떠나 SADI로 자리를 옮겼다. 수년간 쫓기듯 달려오던 일상에서 벗어나 학생들과 함께 느리게 생각할 시간이 처음으로 생겼다.
삼성에서의 나는 늘 바빴다.
“어떻게 하면 더 쉽게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멋져 보일까?”
“어떻게 하면 사용자가 헤매지 않을까?”
이 질문들에 답하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질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 오니,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답을 찾는 사람’에서 ‘질문을 찾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눌러두고 있던 질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왜 이렇게 디자인해야 하는가?”
“이렇게 하면 사용자에게 뭐가 좋다는 것인가?”
“결국 우리는 왜 디자인을 하는가?”
이 질문들은 강의실에서 짧은 토론이 되고, 과제가 되고, 어떤 것은 한 학기 프로젝트로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수업 내내, 그리고 수업을 넘어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다.
그해 여름, 학생들과 함께 지능형 로봇 상호작용 산학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과제는 표면적으로 ‘기술 기반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 발굴’이었지만, 우리는 거의 기술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이 바꿔줄 삶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밀레니얼 세대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성장하고 싶어 했고, 삶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싶어 했으며, 위로받고 싶어 했고, 실제적인 육아 도움까지 필요로 했다.
로봇이 가진 기술을 요구에 맞게 매칭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우리는 그들의 삶 전체를 추적했다. 언제 힘들어하고, 언제 걱정하며, 언제 기계의 도움을 갈망하는지 관찰했다.
그리고 우리는 로봇을 ‘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생활을 이해하는 동반자’로 설계했다.
학생 팀은 이렇게 정리했다.
“사용자가 매번 로봇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사용자의 생활 패턴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용자가 로봇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건 ‘로봇 제품’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로봇이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 순간 나는 전율했다. 삼성에서 수년 동안 고민만 하던 질문들이 눈앞에서 직관적으로 풀리고 있었다. 디자인은 기능을 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의미 있게 바꾸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날 이후 나는 Easy to Live를 본격적인 디자인 개념으로 정립하기 시작했다.
SADI에서 진행한 또 하나의 프로젝트는 나의 생각을 더 확고히 했다. 청년층을 위한 새로운 스크린 경험 개발 프로젝트였다. 클라이언트는 “청년들이 매일 사용하고 싶어지는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원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조사를 마치고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문제는 제품이 아니었어요. 지금의 청년 라이프스타일에는 ‘새로운 스크린’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어요.”
청년층이 TV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다양한 스크린을 가지고 있었고, 공간과 예산에도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기존 스크린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새로운 스크린’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품을 만드는 데 집중하지 않았다. 대신 스크린이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를 탐색했다.
그 결과 학생들은 ‘맥락 기반 스크린’을 제안했다. 여러 일을 동시에 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두었다가 떼었다가 하는,
생활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스크린. 상황에 따라 필요한 정보를 알아서 조절해 주는 ‘생활 동반형 스크린’이었다.
콘셉트 검증 결과는 명확했다.
“편리하다”가 아니라, “내 생활이 달라질 것 같다.” “내가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주니 좋다.” “집 안의 활동들이 스크린 속에서 정리되는 느낌이다.”
사용성이 아니라 삶의 의미가 본질이었다.
처음에는 흐릿했던 ‘Easy to Live’의 개념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디자인은 단순히 도구를 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다시 짜는 일이라는 사실이.
Easy to Live는 기능을 넘어 삶의 의미를 다루는 디자인이다.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이 원리가 어떻게 나의 디자인 철학을 완전히 바꿔 놓았는지,
그리고 왜 AI 시대일수록 더 중요한 기준이 되는지 이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