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아버지를 알아보는 순간
어제 저녁을 먹고 나서, 아무 생각 없이 둘째 아이 손을 잡고 학교에 다녀왔다.
요즘 졸업전시 준비가 막바지에 접어들어 학생들 응원도 해 줄 겸, 집 앞이 사디이기도 해서 산책 삼아 나섰다. 아이는 집을 나설 때부터 괜히 들뜬 표정으로 신나 했다.
학교에 도착하니, 어느 학교나 졸업전을 앞두면 그렇듯 여기저기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마침 늦게까지 남아 작업하던 한 팀을 만났다. 이런저런 질문이 오가고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둘째가 자꾸 끼어들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럼, 너 의견도 말해볼래?”
기회를 주자마자, 이 녀석은 마치 문 열린 마당으로 뛰어나온 강아지처럼 신이 나서 이것저것 생각을 쏟아 놓는다. 학생들은 고맙게도 그 이야기에 적당히 반응해 주며 아이의 기를 살려 주었다.
그럭저럭 급하게 마련된 팀 코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에게 물었다.
“오늘 어땠어, 재미있었어?”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응, 응! 너무 재미있었어.”
라며 마냥 즐거워했다.
오늘도 또 가자고 졸라서, 저녁을 먹고 집사람이 손수 만든 에그타르트를 챙겨 들고 다시 학교에 갔다. 이번에는 어제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남아 있었다. 평소 내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 타과 학생이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해 의견을 구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어느새 둘째가 칠판을 장악하고 서 있었다. 대여섯 명의 누나, 형들 앞에서 그림을 그리며 알아맞히기 게임을 진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헛웃음이 나왔지만 참으며, 이제 그만 괴롭히고 가자며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너무 신난다며, 다음에 또 가고 싶다고 벌써부터 보챘다.
위 사진은 둘째가 학교 칠판에 형, 누나들을 위해 신나게 그려 놓은 그림들이다.
큰아이가 아직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집사람은 맞벌이로 나보다 더 바쁜 편이어서, 유치원 셔틀은 내가 맡고 있었다. 다행히 당시 다니던 연세대학교에 부설 유치원이 있어 출근길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퇴근길에 데려오면 됐다. 큰 부담은 아니었지만, 가끔 예정대로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 날도 있었다.
어느 날은 수업에서 개별 지도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러다가는 유치원 마치는 시간까지 수업을 끝내지 못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학생들에게 잠시 휴식을 하자고 해 두고 급히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몰아 유치원으로 갔다. 다시 강의실로 돌아와 아이를 데리고 들어서니, 서른 명 남짓한 학생들이 웅성웅성하며 상황을 재미있어했다. 눈치 빠른 학생들은 금세 내 딱한 사정을 알아차리고는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며 실기실 맨 뒤로 데려가 돌봐 주었다. 덕분에 나는 수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큰녀석도 대학생 형, 누나들의 친절한 관심이 무척이나 좋았던 모양이다. 정말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잘 있다가 수업을 무사히 마쳤다. 그 학기 동안 비슷한 상황이 두어 번 더 있었고, 그때마다 아이를 데리고 수업을 이어갔다. 당시 나는 생활디자인과 기초 과목으로 소묘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학생 한 명 한 명의 그림을 보다 보면 네 시간 수업이 훌쩍 지나가기 일쑤였다.
큰아이는 2008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니, 그때가 아마 2007년쯤이었을 것이다. 겨울방학이 되자, 어느 날 아이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아빠, 요즘은 왜 학교 안 가?”
처음에는 내가 출근하는 걸 왜 챙기나 싶었는데, 이내 강의실에서 겪었던 그 시간들이 그리워서라는 걸 눈치챘다. 장난기가 발동해 이렇게 답했다.
“글쎄, 형이랑 누나들은 방학 때는 학교에 안 오거든.”
아이는 금세 시무룩해지더니,
“아, 그래.”
하고는 더 묻지 않았다. 그때 기억이 꽤 즐겁고 신기했었던 모양이다.
이제 대학을 졸업한 첫째는 어엿한 청년이 되었지만,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정확한 장면은 서로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의 좋았던 분위기만큼은 또렷하다고 한다.
“뭐가 그렇게 좋았어?”
내 질문에 아이는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아빠가 가르치는 교실에서 아빠가 참 멋있어 보였어. 내가 아빠 아들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서 가슴이 막 벅찼던 것 같아.”
시간을 한참 거슬러,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이다. 당시 아버지는 산골의 금광에서 일하고 계셨다. 요즘 말로 하면 기러기 생활이었고, 정확히는 역기러기였다. 아버지는 타지에서 1년 내내 일하셨고, 우리는 서울에서 살았다. 송금이 쉽지 않던 시절이라 월급날이면 한 달에 한 번씩 꼭 집에 오셨다. 그때의 아버지는 사랑방 손님처럼 느껴졌다.
방학이 되면 어머니는 막내인 나를 데리고 아버지가 일하시는 광산으로 내려갔다. 마지막 인가에서 차로 한 시간을 넘게 산길을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어느 해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며칠 지난날, 어머니와 나는 다시 그곳에 도착했다. 사택에 짐만 내려놓고, 나는 우리가 왔다는 걸 알리러 광산 쪽으로 달려갔다.
광산 입구에서는 지하 1층쯤 깊이로 땅을 파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먼저 나를 알아본 먼 친척뻘 되는 삼촌이
“어, 성식이 왔구나.”
하며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허리를 펴고 나를 보시더니,
“아이고, 왔냐?”
하며 반겨 주셨다.
초등학생 하나가 불쑥 나타난 소동 덕분에 잠시 휴식 시간이 생겼다. 그때 삼촌이 다가와 너스레를 떨며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이고 말도 마라, 니 아부지 때문에 죽겠다.”
내가 의아해하자 삼촌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니 아부지가 손수 삽질을 하시잖아. 일을 안 할 수가 없지.”
그 순간이었다. 내 아이가 내 직장에서 느꼈을 그 형언하기 어려운 벅참과,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해 느꼈던 벅찬 감정이 한순간에 겹쳐졌다. 책에서나 보던 훌륭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눈앞에서 직접 삽질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 깊게 남아 있었다.
내 아이들도 그런 기억을 해 주길 바란 적은 없었지만, 요상하게도 비슷한 순간들이 이렇게 겹쳐졌다.
초등학생 주제에 어른처럼 느껴질 형, 누나들 앞에서 당당하게 떠들고 놀았을 뿐, 내가 느꼈고 큰아이가 느꼈던 그 ‘아버지의 일터에서 받는 아우라’ 같은 것은 아직 전혀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떠랴.
어쩌면 이 녀석도 언젠가, 그날 칠판 앞에서 형, 누나들과 신나게 놀던 순간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때 이 아이가 느낄 감정이 무엇이든, 그것은 오롯이 이 아이의 것이다.
지금은 그저, 이 녀석이 마냥 웃으며
“또 가고 싶어!”
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집 아이들을 묵묵히 받아 준 모든 학생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아버지의 직장은 ‘일하는 곳’이 아니라, 아이에게는 처음으로 어른을 존경하게 되는 장소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아버지의 직장에서 아버지를 다시 보았고,
내 아이들은 내 직장에서 저마다 다른 기억을 만들고 있다.
그 기억의 모양이 무엇이든,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