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왜 목소리를 내지 못했나
정보의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인어공주는 그날도 구글링으로 지구촌 곳곳의 재미있는 소식을 접하며 즐겁게 세상 공부를 하던 중이었어요. 길을 잃고 난파당한 남자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사람이 잘 찾지 않는 깊은 바다에 인간 남자가 허우적거리고 있었답니다. 인어공주는 가까이 다가가 그를 구해주기로 했어요. 어맛, 그런데 이 남자! 왕자님인가 봐요? 혼절한 그를 돕기 위해 인어공주는 남자가 찾던 검색어와 문서를 뒤적이다가 출판 나라 왕자님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출판 나라 차세대 먹거리. 해외 서적 수입 판매 사업계획. (전략기획실 왕자룡)
저런. 출판 나라의 먹거리가 부족해 이런 누추한 곳도 마다하지 않고 탐험하다가 조난을 당했나 봐요. 인어공주는 인간 왕자님의 책임감과 진취적인 태도, 그리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에 크게 감동했어요. 그리고는 왕자님의 매력에 푹 빠져 그를 도와주고 싶었답니다. 왕자님이 어려워하는 정보 검색쯤이야 5개 국어에 능통한 인어공주에게는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인어공주는 아예 왕자님과 함께 회사를 다니기로 결심했어요. 그래서 마녀를 찾아가 출근할 방법을 부탁해 보기로 했답니다.
"다리를 달라고? 네가 그게 왜 필요하지?"
"인간 세상의 회사를 다녀보고 싶어요."
"인어공주야. 지옥을 왜 스스로 들어가려고 하니? 일이 하고 싶다면 내가 프리랜서 자리를 구해줄 수도 있단다."
"사실은, 인간 남자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와 하루 종일 함께 있고 싶어요."
"사랑 때문이라?!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선택인지는 알고 있니? 그리고, 무언가를 얻으려면 지금 네가 가진 소중한 것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 텐데, 그럴 각오까지도 되어있니?"
"상관없어요. 그 사람 곁에만 갈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포기할 준비가 돼있는걸요."
"하지만 인어공주야. 다시 한번 생각해보렴. 인간의 다리는 너에겐 족쇄가 될 거란다. 정보의 바다를 마음껏 넘나들고 하루에도 온 세상 몇 바퀴를 헤엄쳐 다니던 너잖니. 꼬리 대신 두 다리가 생기면 그때부터는 네 힘으로 걸어간 만큼만 움직일 수 있거든. 특히 그 두 다리로 회사를 다닌다는 건 3.3제곱미터도 안 되는 책상에 앉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똑같은 일만 반복할 거란 의미란다. 너처럼 자유롭게 떠돌던 보헤미안이 그런 제약을 견딜 수 있을까?"
"괜찮아요. 지금은 정보의 바다보다 그분의 마음을 탐험하고 싶어요. 그러니, 제 꼬리를 취하시고 다리를 만들어주셔요."
"네가 잃게 될 것은 아름다운 꼬리가 아니란다. 오히려 지금처럼 네 생각과 의견을 분명하게 표출할 수 있는 당찬 목소리지. 회사를 다니면 네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딱 정해져 있어. '넵. 네, 알겠습니다. 넹넹.' 너는 이 범주를 벗어난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을 텐데, 그래도 괜찮겠니? 인간 왕자님한테 사랑을 고백하는 말도 못 들려줄 터인데?"
자신의 마음도 말로 전할 수 없다니! 인어공주는 마녀의 얘기에 퍽 슬퍼졌어요. 하지만 왕자님께 말 대신 진심을 알릴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였답니다. 마녀의 마지막 경고를 들으며 인어공주는 꼬리 대신 다리를 얻어 바다 밖으로 던져졌어요.
"잊지 말거라. 그의 사랑을 끝내 얻지 못하면 넌 물거품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거라는 걸."
인어공주는 드디어 인간 왕자님의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출근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는 화장실 바로 옆자리를 배정받아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이 서류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일만 계속했지요. (주)출판 나라는 백성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일했는데, 왕자님과 자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인어공주는 퍽 서운했어요.
'도대체 왕자님이랑은 언제쯤 같이 일할 수 있는 거지?'
왕자님이 난파당해서 정보의 바다를 헤맬 때 답을 찾도록 도와줬던 일을 떠올리며, 인어공주는 앞으로도 왕자님 곁에서 돕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조심스레 팀장님께 물어보았어요.
"네? 왕자룡 씨요? 그분은 대표님 아드님이니까 신규 사업 찾느라 바쁘시지요. 그럴수록 신입은 신입답게 막내 업무랑 백업을 도와드려야겠죠? 어서 자리로 가서 하던 타이핑 마저 하세요."
인어공주는 자리로 다시 돌아와 원고를 컴퓨터에 입력했어요. 마녀의 저주대로 '네, 알겠습니다.'라고 팀장님께 대답했기 때문이지요.
인어공주는 사무실에 왕자님과 단둘이 남기만을 기대하면서 야근을 했어요. 왕자님은 아직도 차세대 먹거리를 찾느라 정보의 바다 사각지대에서 헤매다가 잠시 졸고 있었지요. 인어공주는 이번에도 정보의 바닷속 흑진주를 찾아 왕자님의 마우스 아래 조심히 갖다 놓았답니다. 그리고는 흐뭇한 표정으로 퇴근 준비를 하러 자리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아뿔싸! 사무실로 누가 들어왔어요. 이웃 사무실에 근무하는 건물주의 딸, 건주님이었지요. 그녀는 늦은 시각까지 건물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출판 나라에 잠시 들어왔어요. 건주님은 홀로 야근하는 왕자님을 발견하곤 가까이 다가갔지요. 오, 이런! 곤히 잠들었던 왕자님이 건주님의 인기척에 깨어나서 그녀를 보고 말았어요. 맙소사. 모니터에 쓰인 텍스트를 본 왕자님은 건주님이 도와준 것으로 착각했나 봐요. 인어공주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답니다.
"이 아이디어, 건주 씨가 적어두신 겁니까? 저 혼자서는 생각도 못했던 분야인데, 완전 감동입니다. 아직 식사 전이시면 제가 맛있는 걸로 보답하고 싶군요. 같이 나가시죠."
"어머, 별거 아닌데.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네요. 술도 같이 사주실 거죠? 후후."
인어공주는 너무 속상해서 두 사람이 사무실을 나갈 때까지 숨어있었답니다. 어차피 왕자님 앞에 나서봤자 '넹넹' 밖에는 대답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인어공주는 왕자님의 사랑을 얻지 못하더라도 진실만은 밝히고 싶었어요. 자신이 애써 만들어놓은 결과물을 건주님한테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정보의 바다에서 발견했던 '사회생활 현실 조언'이 생각났어요. 자기 성과는 스스로 잘 쌓아놓아야 한다고. 비록 목소리는 잃었지만, 건주님이 가로챈 기획 아이디어를 위해 인어공주가 참조했던 각종 데이터와 자료를 모아서 왕자님께 메일로 보내드릴 수는 있잖아요? 현대판 인어공주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업무 일지도 작성하고 틈틈이 각주와 출처 DB도 차곡차곡 저장을 해두었답니다. 고전의 인어공주처럼 억울해서 게거품 물고 바다로 뛰어드는 일이 없도록 말이지요. 우리도 현대판 인어공주처럼 업무 성과와 결과물을 보기 좋게 잘 보관하기로 해요.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이터가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테니까요.
얼마 후 인어공주는 왕자님의 간택을 받아 신규 사업 부서로 발령을 받았답니다. 좋아하는 정보의 바다 탐색도 마음껏 할 수 있게 됐고, 왕자님과도 잦은 회의로 점차 가까워졌지요. 일과 사랑을 모두 쟁취하며 인어공주는 출판 나라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