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들로 모아 본 2023년 연말 결산
연말을 며칠 앞두고,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당신의 연말 결산을 알려주세요!"
조금 뜬금없지만 팀장님 다웠다. 팀원 개개인이 직접 뽑은 '올해의 디자인, 올해의 책/영화, 올해의 스팟, 올해의 인물, 올해의 사건'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메일의 답변으로 무얼 하실 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팔로우하며 엿보고 있던 마케터, 기획자분들이 최근 연말 결산 콘텐츠를 올리고 있어서 흥미 있게 보던 중이라 이 메일도 흥미로웠다. 처음 맞닥뜨렸을 때는 어렵게만 느껴졌던 질문들이 '개인적인'이라는 탈을 쓰니 쉽게 쓰였다. 쓰다 보니 특별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의 콘텐츠인 줄만 알았던 '연말 결산'이 나의 콘텐츠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전달하기보다는 온전히 '개인적인' 연말 결산으로 말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기 좋고, 올해를 내년 내후년에 돌아보기 좋을 것 같아 연말 결산을 정리하기로 했다.
올해의 브랜드 : 모베러웍스
모베러웍스를 알게된 지는 3년 정도 지났다. 모베러웍스의 유튜브 채널 '모티비'에 업로드된 영상 226개를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다 봤다. 그들이 쓴 책은 출간일에 사서 읽었다. 작년, 이직을 준비하며 보았던 모든 면접에서 좋아하는 브랜드를 물었을 때 모베러웍스라고 대답했다. 남들에게는 보통 수준의 팬심일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이 정도로 좋아해 본 경험이 없는 나에게는 대단한 팬심이다.
22년 9월, 이 회사에 들어오고 지금의 팀장님이 그들(모춘님과 소호님)의 전 직장 동료라는 말을 듣고, 역시 세상이 좁긴 좁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그들과의 만남이 성사되어 버렸다. 팀에서 진행하는 '업무교류회'라는 문화활동 덕분이다. 아무튼, 그들을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팬심은 곱절로 늘었다. 이제껏 봐왔던 모티비 영상을 다시 봤다. 이제 그들과 조금 알게 된 사이로서.. ㅎㅎㅎ
2023년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이다.
NHN BX Team & Mobills Group 업무교류회 이야기
올해의 마케팅 : 오롤리데이 팝업스토어
지난 5월, 희진이와 오롤리데이 팝업스토어에 들렀다. 이안이를 맡기고 둘이서 나온 첫 데이트였다. 잠깐의 웨이팅 후 입장했고, 입구에서 마주친 롤리 사장님의 긍정에너지는 여전했다. 1분 정도 이번 팝업스토어에 대한 큐레이션을 해주었고,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브랜드를 각자의 용돈으로 혼쭐을 내줬다.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각자 산 물건들을 보았다. 그러다 롤리 사장님 인스타그램 콘텐츠에 누군가 남긴 "언제 가면 볼 수 있어요?"라는 내용의 댓글을 보게 되었고, "팝업 마지막 날까지 있을 거다."라는 대댓글도 보게 됐다. 우리가 팝업스토어를 방문한 날이 오픈 첫날이었는데, 마지막 날까지, 그렇게 입구에서 모든 방문객을 큐레이션 해줄 작정이셨던 거였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롤리 사장님의 목격담을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미친 진심의 브랜딩이고, 마케팅이라고 생각했다. 오롤리데이를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날이었다.
올해의 서비스 : 폴인
팀장님과 1on1 미팅을 하던 중, 다른 브랜드의 브랜딩에 대해서 많이 보고 공부하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팀장님은 어떤 곳에서 인사이트를 얻으시냐고 물었고, 그중 하나가 '폴인'이었다. 브랜딩 1학년 모범생의 마인드로 바로 폴인 사이트를 디깅하고 앱을 다운받고 한 달 무료 구독을 시작했다. 이전에 롱블랙을 구독했었는데 생각보다 콘텐츠 주제의 풀이 넓었고, 나와 관심사가 먼 콘텐츠들을 잘 읽히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어서 이번에도 조금은 소극적이었다. 다음 달 자동 결제일 전날로 '폴인 구독 취소' 알람을 설정하고 하루에 하나씩 콘텐츠를 공부했다. '브랜딩', '마케팅', '에디팅'이라는 큰 관심사가 잘 맞고, 또 사람을 들여다본다는 데 있어서 흥미로워서 콘텐츠는 꽤 잘 읽혔다. 그리고 기본 상품인 lite 외에 plus로 구독하면 비디오 콘텐츠도 볼 수 있는데 재미있어 보이는 콘텐츠가 많았다. '핵개인: 자기 서사를 만든 사람들' 시리즈 중 가수 윤종신님, 작가 이슬아님의 인터뷰 영상이라든지, 평소에 많이 궁금해하는 마케터 장인성님 인터뷰 영상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폴인 서비스에서 이야기하는 폴인 리브랜딩 스토리가 궁금해서 한 달 무료 구독이 끝나는 날 plus로 1년 치 구독을 해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주 만족하며 서비스를 이용 중이다. 업무에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올해의 아저씨 : 이지보이
희진이가 쇼핑몰 하나를 추천해 줬다. 사장님이 상품을 소개하는 방식이 자기 스타일이라고 했다. 또 내 스타일이기도 할 것이라고 했다. 옷 스타일도 괜찮으니까 한 번 보라고 했다. 처음 본 상품 소개 이미지는 빗속에서 누군가 춤추는 사진이었다. 두 번째 이미지는 그 누군가가 어느 들판을 아주 큰 보폭으로 뛰는 사진이었다. 다른 쇼핑몰과 달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비주얼(외모)의 모델이었다. 그리고, 상품 소개 글을 읽는 순간 왜 희진이가 이 쇼핑몰을 소개해 준 지 알게 되었다.
ELAEXD WORK SET UP, COMFORTABLE EASY SET UP 등등, 제품명 후보가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만 결국엔 다 떼어내고 ‘ZERO’ 하나만 남겼습니다. 이 단어 하나면 제품을 설명하기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경량 나일론 원단은 이름 그대로 가볍습니다. 조금 보태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느낌이라고 먼저 착용해 본 팀원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위사가 한 줄씩 더 들어있는 립 원단은 외부 충격에 강하고 내구성이 뛰어납니다. 늘 고수하고 있는 더블 체인 스티치 봉제를 주요 포인트에 배치하여 또 한 번 튼튼합니다. 워셔가공으로 마무리한 원단은 보다 상쾌한 터치감과 세탁 시 변형의 위험을 줄여줍니다. 하여 저희가 전하고 싶은 ‘ZERO’의 의미는 가볍다 라는 의미도 있지만, 아무것도 필요 없다 라는 의미도 함께 있습니다. 배낭에 둘둘 말아 넣고 가벼운 여행을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 TIEB의 'ZERO PANTS' 상품 소개 글 전문
다른 상품 소개 글도 찾아보고, 사장님의 인스타그램도 열심히 들여다 본 결과, 더 이상 TIEB는 나에게 쇼핑몰이 아니었다. 하나의 잘 만들어진 브랜드였다. 그렇게 TIEB의 상품을 몇 가지 구매하게 되었다. 상품을 구매해 보니 가격도, 품질도 모두 좋았다. 오프라인 공간의 아늑함도 좋았다. 마지막으로 특히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염탐하는 사장님의 일상이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모범적이어서 참 좋았다. 가정에서 모범적이신 분의 '아이를 등원시키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빗속에서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뭐가 그리 신나는지는 모르겠으나 혼자서 신이 나서 춤추는 모습'을 보고 인생의 롤 모델로 삼기로 했다. 누군가의 남편, 아빠,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서 진심으로 인생을 즐기는 사람을 나는 정말이지 처음으로 보았다.
즐거움이 넘치는 이지보이님의 인스타그램 계정(@easyboyisfree)
올해의 장소 : 금남커퓌
매주 금요일마다 재택근무를 할 때 들렀던 동네 카페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남짓이고, 9시에 문을 열기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가기 좋았다. 오후 타임에 다른 곳들을 돌아다녀 봐도 여기만큼 일하기 좋은 카페가 없었다. 커피도 산미가 약한 고소한 맛의 원두가 있어서 내 스타일이다. 특히 라떼에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금남커피'가 시그니처 메뉴인데, 정말 한 번도 빠짐없이 이것만 시켜 먹었다. 그만큼 질리지 않고 맛있다. 한 여름 어느 날에는 창가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그늘막을 내려 해를 가려주었다. 그 배려에 감동해서 주말에 이안이 와도 한두 번 방문했었다. (희진이는 시끄러운 카페를 싫어한다ㅎㅎ) 인테리어도 분위기도 상계동 치고는 꽤 힙해서 친구가 집으로 놀러 오면 항상 이 카페에 데려간다. 그만큼 동네에서는 아끼는 카페다. 정말 아쉬운 건, 2024년부터는 회사의 재택근무가 사라져서 카페에서 일하는 날도 아주 드물어질 예정이라는 것이다.
올해의 프로젝트 : 그룹 웹사이트 리뉴얼
나는 카피라이터였고, 브랜드 마케터였다. 그리고 지금은 브랜드 기획자이다. 올해 3월 내가 속한 BX팀이 디자인실로 소속을 옮기게 되었고, 첫 면담에서 실장님께서 웹 기획을 해본 적 있는지 물으셨다. 첫 직장에서 (언제 적) 갤럭시 S8 웹사이트를 기획한 기억이 있고, 이전 직장에서 온라인 프로모션용 웹페이지를 기획해 봤다고 답변했다. 그렇게 그룹 웹사이트 리뉴얼 프로젝트의 웹 기획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심지어 이 회사에서의 첫 PM으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 빼고 모두가 디자이너인 디자인실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GNB, LNB의 차이도 모르지만, 다른 계열사의 웹사이트 기획 문서도 구해서 보고, 나름 고군분투를 하며 11월 20일 웹사이트를 런칭했다. 예전 같았으면 포트폴리오 한 장이 채워졌다는 이유로 뿌듯한 마음이었겠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해보지 않았던 업무라는 핑계로 중간중간 놓치는 부분이 많아서 참 아쉬웠다. 다른 사람의 실수였다면 "해결하면 되죠! / 해결했으면 됐죠!"라고 말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일들이 나의 실수가 되다 보니 하나하나 또렷이 기억되었다. 그래도 몸을 부딪혀가며 한 경험이라, 한 번 더 하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번 그룹 웹사이트 리뉴얼도 7년 만의 작업이라 쉽게 만회할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겠다. 아무튼 브랜드 기획자로서의 2023년 가장 큰 프로젝트는 그룹 웹사이트 리뉴얼임에는 틀림이 없다.
장장 8개월 동안 공을 들여 리뉴얼한 NHN 그룹사 웹사이트
그리고 빠지면 아쉬운, NHN BX팀의 SNS 채널 구축 프로젝트. 하나의 돌에 불과한 원고를 써내면 팀장님의 날카로운 피드백에 의해 깎이고 또 깎여, 빛을 발하는 우리 팀의 콘텐츠가 완성된다.
올해의 책 : 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제 누군가가 "좋아하는 작가가 있나요?"라고 물어볼 때 대답할 작가님이 생겼다. 작가님의 쉽게 쓰여 쉽게 읽히는 글이 좋았다.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쓸 테니, 자신의 글을 구독하라는 프로젝트의 신선함이 좋았고, 실제로 그걸 해내는 실행력이 좋았다. 작가님의 프로젝트는 2018년부터 시작되었지만 나는 2023년이 되어서야 작가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아무튼 나에게 올해의 책은 '일간 이슬아 수필집'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이슬아'이다.
올해의 콘텐츠 : 메타코미디클럽
메타코미디클럽을 보는 그 30분 동안은 정말 아무 걱정 없이 웃었다. 메타코미디클럽 덕분에 지하철, 버스, 길거리 등 스마트폰을 보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낄낄대는 실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웃음벨 메타코미디클럽 유튜브 계정(@metacomedyclub)
사실 특별할 것 없는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놓으니 2023년 한 해가 휘발되지 않고 일부분이나마 또렷한 기억으로 남게 된 듯하다. 2023년 12월 30일 늦은 밤부터 2024년 1월 2일 새벽까지, 어느 정도의 공을 들여 이 글을 적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