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선택권에서, 그리고 선택권은 자유의지에서 나온다는 것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는가.
인간에게 의식이라는 것이 있는가의 문제와 비슷할 것 같다.
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는 생물에 대해 과학적으로 분석한 <느끼고 아는 존재> 라는 책을 읽으면서
대체 왜 내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가 머리 아파했던 적이 있다.
상담 선생님이 준 책이라 반가워하며 펼쳤는데 너무 어려워서 중간 부분을 넘기지 못하고 덮고 말았다.
이제 와서 생각하건대 선생님이 이렇게 전문적인 책의 일독을 권유했던 건 인간이 의식이라는 것을 가짐으로써 발생하는 어떤 다른 차원의 세계가 존재함을 인식해 보라는 시도였던 것 같다.
( '무의식' 말이다)
인간을 단순히 "예측 기계"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뇌와 호르몬에 의해 결정되는 자동반응의 산물로 인간의 삶을 정의할 수 있다.
뇌과학과 신경과학에서 인간의 선택이라는 것은 유전적 소인, 경험과 환경을 통한 데이터의 축적, 신체적인 제약 등의 영향을 받는 일종의 기계적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허무하고 지루하지 않은가.
삶이 이렇게만 진행된다면 말이다.
인간의 행동은
감각 기관에서의 자극 입력 ->
지각된 데이터의 인식 ->
경험에 의한 정보의 분석과 저장 ->
극한의 효율 추구와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결정과 선택->
행동 실행
대충 이런 과정으로 묘사된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행동이 무의식과 패턴화의 산물이며,
인간을 인지도식과 자동화 반응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모든 관점에서 이렇게 편파적으로만 인간을 보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이 얼마나 무의식의 영향을 지배적으로 받는지 알고 나면 그것이 작용하는 기전이 꽤나 흥미롭다.
그게 심리학 공부의 재미라고 할까.
무의식 분야의 대가 중 가장 관심을 끄는 사람은 융이다.
융은 개성화 과정을 통해 자기와 연결되는 것을 삶의 진정한 목적지로 보는데,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무의식의 의식화'이다.
뭐 어려운 말 같은 거 다 치우고 그냥 내 무의식을 들여다보고 알아차리는 일인 것이다.
개성화의 시작은 보통 삶의 균열에서 시작된다.
특히나 인생의 초반기에서 후반기로 넘어가는 중년의 시기에 찾아오는 방황에서 개성화의 싹이 튼다.
( 40 춘기라는 말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
젊은 생애 동안 사회화를 위해 든든히 구축해 두었던 페르소나를 이용했다면,
40대 이후에는 내면에 시선을 돌리고 진짜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억압해 두었던 그림자와의 조우, 페르소나 뒤에 숨어있던 진정한 자기를 찾고,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통합을 이루는 과정.
쉽게 말해 무의식에 끌려다니던 삶을 내가 의식적으로 이끌어가게 되는 능력을 키우는 것.
이 과정에서 무의식의 강압적인 힘을 뿌리치기 위해 자유의지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비행기를 조종하는 일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 자동항법장치를 이용한다.
이미 자동화된 시스템이다. 오랜 경험과 데이터를 이용해 정해진 항로를 따라 운행한다.
그러다 갑자기 돌발상황을 만난다.
수동으로 운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준비가 되어 있다면 당황하지 않겠지만,
자동 운행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메커니즘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만다.
뇌는 구두쇠라고 했다.
뇌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다. 당연히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쓸데없는 일에는 신경을 끈다.
항상 그렇게 해왔던 일들, 주변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하니까, 부모님이 그렇게 살았으니까, 어릴 적부터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쉽게 습득한 삶의 방식은 점점 더 쉬운 방향으로 향한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살고 싶은 뇌는 일처리를 항상 똑같이 한다.
그래서 내가 의지를 써야 할 때 제대로 일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내가 원하는 방식이 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으면 평생 알 수 없는 채로 살아간다.
그게 무의식에 의한 자동항법장치다.
반대로 이런 것들의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이상하게 삶이 더 불안해진다.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감정이 소모되고 힘은 딸리고 마음은 흔들린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없이 살다 보면 어느새 인생은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이게 자유의지에 의한 수동조절 모드이다.
다만 수동조절 모드는 항상 좋은 게 아니다.
난기류가 심할수록, 조종사가 과도하게 개입하면 오히려 사고 확률이 올라간다.
마찬가지로 삶의 난이도가 극악이거나 감정이 극단에 있을 때,
억지로 모든 것들을 통제하려 들면 삶의 질은 떨어지고 힘겹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성숙한 자유의지는 항상 모든 상황에서 의식적으로 통제하고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맞춰 개입을 보류할 줄 아는 능력도 포함한다.
융적으로 보자면, 자동모드는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의 축적된 항로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 항로는 훌륭하고 매끄럽다. 믿을만하다는 얘기다.
수동조절은 자기(Self)가 신호를 보낼 때 자아(Ego)가 응답하는 행위에 가깝다.
우리는 자동모드로 살아가되, 전환 가능성을 상시 보유한 상태로 살아야 한다.
이 가능성이 사라질 때, 인생은 편하지만 의미가 없어지고 길을 잃는다.
반대로 이 가능성을 인정할 때, 무의식과 의식은 협력 관계가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조절해야 하는 것과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되는 것, 의식적인 상태와 무의식의 조종을 총체적으로 관망하는 행위.
무의식과 패턴에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상태.
자유의지는 나에 대한 메타인지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