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비 2만 원

힘들지만, 함께해서 즐거웠다 ③

by yangTV

처음, 우리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풍족하게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만족하며 생활해 나갈 수는 있었다. 계획적인 내 아내 덕분에 적은 돈이긴 하지만 저축도 조금씩 해 나갔고,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하는 생활도 소소하게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문제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어났다. 다니고 있던 회사 경영이 어려워져 정기적으로 나오던 상여금도 반납해야 했고, 결국 월급만으로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빨리 회사 상황이 회복되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가뜩이나 힘든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이라 할까? 이전보다 더 경제적으로 빠듯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경제 사정은 더 나빠졌지만, 그렇다고 부모님들께 손을 벌릴 수도, 사실을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양가 부모님들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았던 것도 이유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사실을 알렸을 때 괜한 걱정을 끼쳐 가슴 아파하실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든, 우리가 번 돈 안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돈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부모님 생신선물, 명절에 가져가야 할 선물, 부모님 용돈, 친한 친구들의 결혼식, 회사 동료의 결혼이나 상조 등 돈을 써야 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써야 할 곳은 많아지는데, 우리가 가진 것은 얼마 없었다. 전기세를 아끼려고 콘센트란 콘센트는 쓸 때 외에는 빼놓고, 전등은 되도록 늦게 키려고 했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니려고 했고, 통신비를 더 줄이기 위해 인터넷을 해약하는 등 줄일 수 있는 곳은 최대한 줄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아끼고 있던 우리에게 그런 노력의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아낄 수 있는 곳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생활비를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 생신이 곧 다가오면, 부모님 선물이나 교통비를 모으기 위해 두세 달 전부터 생활비에서 미리미리 조금씩 떼어 놓았다. 그렇게 해도 갑작스럽게 생기는 병원비나, 경조비를 충당하기에는 어려웠다. 결국, 우리가 쓸 수 있는 돈은 일주일 생활비 2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당연히 당장 먹을 것이 부족했다.


그런 우리에게 희망이 되어 준 것은 근처 동네에 정기적으로 오는 “야채 아저씨”였다.


일주일에 한 번,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우리가 “야채 아저씨”라고 부르는 분이 트럭에 각종 야채를 싣고 왔다. 거기서 파는 야채는 싸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신선 했다. 자주 물건을 사다 보니, 가끔 아저씨가 물건 가격을 깎아 주기도 했다. 배추, 양파, 당근, 호박, 버섯, 파 등 없는 것이 없었다.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만원 정도면 일주일 먹을 야채를 살 수 있었다. “야채 아저씨”가 없었다면, 우리의 생활은 아마도 더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내 아내 덕분이다. 내 아내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싫다는 말이나 짜증도 내지 않았고, 다만 어떻게 하면 더 아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분명 아내도 속상했을 터인데 내색도 하지 않고, 우리 부모님에게 자식 된 도리를 다하려 하고, 퇴근하고 집에 오면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그런 내 아내가 지금도 고맙고, 미안하고 또 고맙다.





사랑하는 자기야.


항상 자기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려고 해.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그렇게 결혼하며 다짐했는데, 널 힘들게 했던 그 날들이 지금도 미안해.

괜히 나와 결혼해서 널 힘들게 만든 것은 아닌지…

그때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몰라.


그래도, 내 옆에 있어준 너에게 이 말을 하고 싶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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