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명이 거대 전쟁 서사의 연료로 소모되는 시대
'힌드의 목소리'라는 영화를 보았다.
난 그 영화를 보고 안네의 일기를 떠올렸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자신의 소셜미디어 X(구 트위터)에 이스라엘 군이 팔레스타인인의 시신을 건물에서 떨어뜨리는 장면으로 알려진 영상을 공유한 일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진영 시선과 다름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정치진영적 전략적 사고의 공포 위험 또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속 가자지구에 살았던 목소리만으로도 느껴지는 그 영특하고 귀여운 6살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아직도 나의 귓가에서 맴돈다. 하지만 비록 그들에게는 진심을 담은 영화이기도 하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반쪽 짜리 진실을 담은 프로파간다영화일 수도 있다. 요사이 이런 일방정치적 진영 상상력으로 범벅된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범람하고 있다.어쩔 수 없다.그러나 두 개의 진영적 상상 뿐이라는게 아쉽다.
영화 '힌드의 목소리'는 24년 1월 29일,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 테러 이후 가자지구에 대피 명령이 떨어진 날. 6살 팔레스타인 소녀로부터 1통의 신고가 접수된다. “나한테 총을 쏘고 있어요, 제발 데리러 와 주세요” 적신월사는 구조대와 단 8분 거리에 있는 ‘힌드’를 구하기 위해 조정 절차를 이어가지만 구조 작전은 무려 5시간 동안 이어진다. 영화 내내 6살 소녀의 귀여운 목소리가 그렇게 똑똑하게 구조를 갈구하는 목소리는 정말 가슴을 찢어지게 만든다
"아줌마 저를 데리려 와 줘요. 저는 총소리가 나는 작은 자동차 안에 갇혀 있고
아줌마가 올 수 없다면 아줌마 남편에게 전화해서 저 좀 구해달라고 해줘요"라고 할 때는 정말 극장을 박차고 나가고 싶을 정도로 미쳐버리는 것 같은 감정을 떨칠 수 없었다.
왜 이 영화를 선택해서 이 같은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물론 엄연히 존재했던 전장의 소녀의 불행을 가능한 혹은 무의식적으로 외면하려는 수많은 지구 위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후회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영화는 그 실제 6살 소녀의 목소리를 사용해서 그 적신월사의 사무실에 있는 듯 생생하게 인간의 무력감을 체험시켰다. 누구에게 이 책임을 물어야 할까? 그 모든 게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다른 이유를 찾는다. 내가 받는 무력감에서 도피하여 새로운 명분을 찾으려는 본능이나 또 다른 정치적 입장을 찾기 위한 것이다. 난 근본적으로 정치세력들의 전략 전술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 게 지금 무당파민중에게는 중요한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왜 아무 관련 없는 어린 소녀를 희생 삼아야 할까? 그냥 6살 소녀 하나정도는 죽음에서 구해주는 인간적인 여유와 아량이 이스라엘군에게 왜 없는 것일까?
영화에서 언급되었듯이 6살 소녀를 구해주는 이스라엘군의 평화적 제스처로 활용하면서 이스라엘 홍보의 하나로 사용하지 못할까? 그 정도로 머리가 없는가?
그냥 이스라엘군의 지독하고 악랄한 비인륜적인 태도를 규탄하는 일만 해야 하는가?
하마스와 이스라엘 양극단 정치세력의 전쟁에서 불가피한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의 구조를 탓해야 하는가?
어쩌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본다.전쟁으로 인해 죽는 생명이나 일상에서 사라지는 생명의 가치는 다를 바 없다
죽음은 삶의 도처에 있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한 70대 남자가 있었다. 상처 이후 혼자 살면서 성실하게 살아갔다. 누구 하고도 싸우지도 않고 항상 배려 가득한 깊은 인격으로 대우받았다. 그런데 그가 처음 만난 여자에게 건네준 명함 하나가 70 평생 살아왔던 삶의 태도를 황당하게 붕괴시킨다. 의처증이 있는 그 여자의 남편이 자신의 아내와 그 남자를 불륜으로 의심하였다. 어떤 근거도 없이 명함 하나가 책갈피에 끼워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남자는 죽임을 당했다.
미국에서 갓 돌아온 의사부부는 그날따라 거실 창문을 잠그지 않았다. 그 창문으로 들어온 두 명의 강도 인기척에 깬 두 사람의 다리를 찔렀는데 미국식으로 911로 누르기만 했다가 과다출혈로 아내가 죽었다. 잠시 부주의했던 창문잠금 그리고 119를 몰랐던 이유만으로 평생 의사로 살았던 몇 시간 만에 황당하게 아내가 죽었다.
밤늦게 까지 시골에 있는 가족을 위해 공장을 다니다가 집으로 오는 외진 골목에 숨어 있던 연쇄살인자의 낚아챔으로 졸지에 죽은 20대 여자의 삶은 그 얼마나 기구한가?
기구함과 황당한 죽음을 따지자면 그 6살 소녀의 죽음만큼 기구하고 안타까운 죽음은 그야말로 도처에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무고함은 죽음에서 벗어날 방패가 되지 못하고 대처할 수 없는 악랄한 개인이 누군가의 불행을 만들어 낸다. 지독하고 악랄한 정치적 망상은 무고한 인간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도 일어서는 관객이 없었다. 그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전쟁의 비극성은 고스란히 전해받는다 …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왜 겨우 6살 소녀를 구할 수 없었을까 이스라엘군의 잔인성에 대해 규탄하고 전쟁일반에 대해 평화를 외치기만 한다면 또 다른 소녀들의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수 있는가?
혹시 그 소녀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봐야 할 또 다른 구조는 없는 것일까?
왜 이스라엘 군은 5시간 동안 적십자앰뷸런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는가? 혹시 이 소녀를 두고 양정치세력이 서로의 프로파간다로 활용당하지 않으려는 다른 공포와 위험 부담이 만든 결과는 아니었을까?
물론 영화는 가슴 아프게 이스라엘의 만행을 규탄하도록 설계되었을 뿐이다.
이 가슴 아픈 사실 하나를 두고 우리는 정치세력들의 전략과 전술을 이해해야 한다. 감상적인 동정과 아픔만으로 앞으로 이런 일을 막을 수 없다
이 비극의 이면에는 거대한 ‘구조적 불신’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적신월사(PRCS)를 중립적 구호 기관이 아니라 하마스의 병력과 무기를 숨겨 나르는 ‘위장 수단’으로 간주한다. 힌드를 구하러 가야 할 앰뷸런스는 이스라엘의 시선에서 ‘인도주의적 상징’이 아닌 ‘전술적 위협’ 혹은 ‘제거 대상’으로 치환되었다. 결국 6시간 만에 진입한 앰뷸런스는 폭파되었고, 힌드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들의 의심이 사실이든 아니든, 분명한 것은 6살 아이가 그 계산들 사이에서 5시간을 버티다 죽어갔다는 사실이다.
무고함은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나는 왜 6살 소녀의 죽음을 일상의 다른 죽음들과 굳이 연결하려 할까?
전쟁의 구조적 폭력을 개인적 불행과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은 오히려 본질을 흐리는 것 아닐까?
힌드의 죽음은 의처증에 걸린 남편이 70대 노인을 살해한 광기나, 강도에게 찔려 습관적으로 911을 눌렀다 숨진 의사 부부의 불운과 그 무게가 같지 않다. 내가 그 죽음들을 함께 떠올린 이유는 단 하나다. 그들은 모두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들 중 누구도 구해주지 못했다.
일상의 무고한 죽음은 ‘개인의 광기’가 만들지만, 힌드의 죽음은 ‘구조의 광기’가 만든다. 개인의 광기는 우연히 무고한 사람을 덮치지만, 정치 세력의 광기는 무고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계산에 넣는다. 그 계산기 위에서 아이의 목숨은 협상 카드의 무게로 환산된다. 한쪽은 프로파간다의 연료로, 다른 쪽은 제거해야 할 변수로.
이 아픈 사건은 완전히 중립적인 기구의 부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전쟁의 늪에 빠진 정치세력들의 불안과 공포의 상상력이다. 저 영악한 이들이 또 무슨 일을 꾸밀 수 있다는.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 선악으로 만 전쟁 구조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혹 그들이 어린아이를 수단화해서 오히려 전격적인 하마스 소탕 작전을 목표로 한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의 흐름을 끊으려는 전술의 일환으로 삼으려 했을까? 그를 통해 하마스의 편에 가까운 팔레스타인 적십자의 평화적 메시지의 도구가 될 소녀의 존재가 부담스러웠을까?
6시간 만에 들어간 앰뷸런스는 왜 또 폭파시켰을까?
우리는 상대방의 무모함의 여러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전쟁의 논리는 그것을 설명해 낸다
소개령을 내렸고 공습 중인데 적들이 와서 피해지역 내의 게릴라들을 탈출시키려 한다면? 그리고 6살 소녀의 구출을 하마스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성과로 치장할까 두려웠을까?
구월신사는 sns 생중계까지 하면서 구출작전을 활용한 듯하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적인 추축이다 )
그것이 오히려 이스라엘을 더 자극해서 여론적 전술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미친 광기로 만든 게 아닐까?
나는 확신할 수는 없다 이미 두 정치 세력들은 미친 돌격의 광기만을 가진 것이다
정치세력들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을 크라우제비츠의 논리의 늪에 빠진 것이다
전쟁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것은 적군이 아니다. 무고한 생명만큼은 어린아이만큼은 제발 예외'로 삼자는 중간자들의 평화적 요청은 그들 귀에 성경 혹은 코란 읽기나 다름없다.
그리고 영화는 이제 변화되어야 한다. 포로 파간다로 상처와 아픔을 활용하여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이런 영화를 만들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두 정치세력과는 다른 위치와 상상 진실의 영화가 나와야 한다. 왜 일상과 전쟁 구조에서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는가? 일방만을 편드는, 인간적인 깃발만 휘두르며 제노사이드를 피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봉쇄하는 정치세력들의 일방 메시지의 영화들에 대한 시각을 제공해야 한다.
우리는 수많은 나치들의 폭력을 다른 유대인 자본의 영화들을 봐왔다. 그런 영화들은 분명히 입체적인 정치세력들의 프로파간다영화일 수도 있다. 공히 그 같은 영화들은 무고한 어린 아이나 평범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 세운다.
아프지만 감성이 아니라 정치세력들의 전략과 전술을 이해해야 하고 우리는 그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한
여러 준비를 해야 한다.
전쟁은 오직 돌격의 관성만이 존재하며, 그 관성 안에서 무고한 생명은 먼저 소비된다.
일상의 죽음은 광기 어린 개인이 만들고, 전쟁의 죽음은 광기 어린 정치세력이 만듭니다. 전쟁은 그 비극을 더 크고, 조직적이며, 반복적으로 생산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어떤 전쟁 가능 주체와 관계에 대해 입체적인 깊은 이해가 공유되어야 한다.
전쟁이 끝나면 좋겠지만 그 전쟁의 주체에 대해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기구나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것은 이제 인정해야 한다. 평화를 외치는 기구나 개인들은 힌드의 목소리 같은 그야말로 매표연극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실제로 앞으로 일어날 또 다른 6살 소녀를 구할 방법을 고민하기보단 상대의 악을 드러내는 안네의 일기 같은 허무한 짓을 반복할 뿐.
6살 소녀를 죽인 것은 이스라엘군이지만 하마스와 적신월사의 책임은 없을까?
솔직히 나같으면 그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 같다.차라리 그들이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면. 의심 받는 적신월사와의 연결이 6살 아이를 오히려 위협에 빠뜨렸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스치고 지나갔다.물론 그 전화를 받은 적신월사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선택이었겠지만. 궁극적으로 전쟁의 현장에서는 어떤 정치세력과 연관되는 것 자체가 위험한 늪에 빠지는 것이다 . 정의의 명분과 선악은 어떤 관련이 없다 .
이제 평화의 감성만큼 정치세력의 구조를, 선악이 아니라 그 정치세력들의 분노와 공포와 역학, 한계를 좀 거리를 두고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