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세 개의 진영-영화'내 이름은'

by 신지승

글을 시작하기전에

개인적으로 4.3을 보는 나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 물론 동의하지 않는 분은 이 글이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읽지 마시라 !

4.3을 이해하는 데는 최소한 세 개의 층위가 필요하다.

국가가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방식으로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사실. 제주 남로당이 제주도의 지형적·사회적 조건을 활용해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려 했던 정치적 전략과 무장 투쟁. 그리고 그 격돌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았던 주민들의 생존 탈주극. 이 세 층위는 서로를 지우는 관계가 아니다. 겹쳐 있다. 하나만 강조하면 나머지가 지워진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입장이다.

어떤 층위를 의도적으로 지우고 있는가, 그것이다. 물론 영화를 만드는 자의 결단이다.


그중에 가장 관습적이고 낡고 오래되고 저열한 서사의 방식이 피해자서사이다 .그것은 피해자를 가장 낮은 ,존엄성을 제거하는 자리에 놓는 서사방식이기 때문이다.그들에게 정치적 선택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의 순장주의적 윤리적 태도와 비슷하다.


피해자 서사는 첫 번째 층위—국가 폭력—를 선명하게 전면에 놓는다. 그 선명함이 나머지 두 층위를 배경으로 밀어낸다. 제주 남로당의 소위 민중의 힘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오만한 전략과 급진 모험주의 전술 실패는 사라지고, 주민들의 선택과 갈등도 사라진다. 남는 것은 착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희생당했다는 이야기다. 틀리지 않았지만, 앞으로 반복될 수 있을 제노사이드의 비극을 막기에는 너무나 불완전하다.

피해자 서사는 슬픔을 남기지만, 다음 행동의 기준을 주지 않는다. 비슷한 폭력이 다시 왔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려면, 선택하고 실패하고 저항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있어야 한다.


영화 〈내 이름은〉을 보고 나서 불편함이 오래 남았다.

그런데 스크린을 가득 채운 건 학원 폭력이었다. 조직화된 무리에게 짓눌리는 학생, 침묵하는 다수들, 그리고 반복되는 폭력의 장면들. 어느 순간 이것이 4.3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말죽거리 잔혹사의 제주판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 헷갈림 자체가 이 영화의 문제다.


메타포가 역사를 덮는다

학원 폭력은 4.3의 메타포로 쓰였다. 조직적 폭력 앞에 주눅든 학생 = 국가폭력 앞의 민중. 이 등식은 얼핏 선명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역사를 무력하게 만든다.


1948년 제주도는 단독선거를 둘러싼 격렬한 이념 충돌의 현장이었다. 남로당은 제주도라는 섬의 지형적, 사회적 특성을 활용하면 제주 민중의 힘만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하나의 오만하고 혁명교과서적인 김달삼의 정치적 전략이었고, 거기에는 선택과 의지와 실패가 함께 있었다. 그 위에 국가가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폭력으로 응답했다.


이 복잡성을 학원 폭력의 구도로 압축하면, 남는 것은 "악랄한 국가권력이 무고한 민중을 짓밟았다"는 이야기다. 이스라엘 국가권력이 가자지구의 무고한 민중을 학살하고 있다는 명제만 남기고,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오랜 갈등의 역사, 그리고 하마스의 기습적인 테러 ,이스라엘의 군사적 위력 대응 그 한가운데 놓인 가자지구 민중의 생존이라는 세 층위를 지워버리는 것과 같은 오류다. 피해의 사실은 남지만, 정치적 맥락은 사라진다.

그냥 강하고 압도적이고 지속적인 폭압적 국가권력과 자기식의 정의와 저항의 약한 물리력으로만 선 악을 구별하라는 정치적 강박과 다름 아니다 .나는 하마스의 편도 이스라엘의 편도 아닌 두 극단 정치세력이 민초들의 삶을 짓밝는다는 생각이며 제주 4.3도 그와 같다 .


영화 안의 장치, 그리고 그 한계

영화 안에는 권력층의 아들이 학교 갈등을 설계하고, 그 어머니는 정신과 의사로서 4.3 피해자의 기억을 '다루는' 위치에 있다.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기억을 호출하고 정리하는 권한까지 권력이 쥐고 있다는 구조. 누가 말할 수 있는지, 무엇이 기억으로 인정되는지를 결정하는 주체가 당사자가 아니라 권력과 제도라는 문제. 그렇게 읽으면 정신과 의사는 치료자가 아니라 기억과 역사의 관리자다. 진상 규명과 증언과 기록이 항상 권력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비틀어 보여주려는 장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장치는 끝내 작동하지 않는다. 기억의 권력을 배치해놓고도, 그 기억의 주체인 피해자는 결국 피해자 서사의 미시적 역사를 복원해 낸다. 견디거나, 침묵하거나, 무너진다. 기억의 주체성을 되찾는 것이 피해자 당사자여야 한다는 도식은 전형적이지만, 그 도식조차 씻김굿 퍼포먼스로 수많은 영화에서 봐 온 듯한 구태의연함으로 마무리한다 . 그냥 웃음만 나온다 . 솔직히 트라우마를 어루만지기 위한 장치라고는 하지만 너무 흔하게 봐 온 영화적 표현을 반복 모방하는 듯 영화적 카타르시스를 주기는 부족했다. 영화는 자기만의 예술적 표현을 찾는데 무능력했다.

살목기의 관광지와 4.3의 보리밭

〈살목기〉가 개봉하고 나서, 사람들이 그 배경이 된 공간을 찾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던 장소가 현실의 관광지가 되었다. 왕사남의 이야기가 영월을 순례지로 만든 것과 다르지 않다. 성공한 콘텐츠가 대중의 관심을 만들어낸다.

4.3의 현장은 그렇게 만들어질 수 없었다. 학살이 벌어진 곳은 누군가의 보리밭이었고, 돌담이었고, 이름 없는 오름이었다. 영화가 가리킬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가 없었다. 특정되지 않기 때문에 찾아갈 수도 없고, 찾아갈 수 없기 때문에 관광지도 되지 못했다. 물론 제주가 원하는 것도 그런 관광 소비가 아니다. 〈내 이름은〉이 학교라는 공간을 선택한 것은 4.3의 현재적 의미를 찾는 데 개인적으론 우회하려는 시도 로 실패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회한 순간, 역사의 구체성도 함께 사라졌다. 5.18까지 끌어들였지만, 4.3을 만나려는 오늘의 정치적으로 진화된 관객을 정서적으로나 정치의식적으로도 공감시키지 못할 것 같다.


4.3을 이야기하는 방법이 하나일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방식은 역사를 열고, 어떤 방식은 역사를 닫는다.


피해자로만 기억되는 민중은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그 질문을 이 영화는 비껴갔다.

기본적으로 역사적 고민이 얕고 정치적 의식도 몽롱하고 프로파간다적 진영의식만 강하다.

지금 영화계에서 4.3을 둘러싼 극단적 해석들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 어떤 작품은 피해를 강조하고, 어떤 작품은 그 피해조차 부정한다. 1940~50년대의 이념 대결이 스크린 위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한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선택하고 실패하고 저항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것은 아직껏 용기가 필요한 환경을 만들고 있다 . 세계는 AI로 문명 변곡점을 향해가는데 현재 한국은 양극단의 낡은 정치적 세력들이 다양한 상상을를 가로막고 있는 해방후 좌우익대립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의 정치가 예술가들은 민중과 대중을 낡은 역사적 정의와 결부시킨다 .민중은 정치보다 더 귀한 미래의 보리밭이다 .4.3 으로 순장된 것은 정치보다 더 중요한 미래 , 제주 민중의 생명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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