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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극, 브레히트 연극, 그리고 마을영화의 관계

by 신지승


강희진 작가(소설가)와의 토론에서 제기된 마당극, 브레히트 연극, 그리고 마을영화의 상관성은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세 가지가 어떻게 서로 다른 예술적‧정치적 프레임 안에서 관객‧참여자와의 관계를 구축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흥미로웠다. 나는 이미 만들어진 스토리 프레임 속에서 참여자를 배치하는 기존 방식과, 참여자가 스스로의 스토리 프레임을 형성하게끔 권력을 이양하는 마을영화의 중심적 가능성에 대해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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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의 문제: 열림과 닫힘

정치적 풀뿌리 운동, 참여 연극, 커뮤니티 예술은 자주 “열림”과 “참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사전적으로 설정된 프레임을 없애지 못한 채, 오히려 저항의 프레임을 고착화하는 경향이 있다. 브레히트의 열린 연극도 이야기의 틀을 관객에게 완전히 건네주지는 않았다. 대신 비판적 사고를 유도하고, 관객이 주어진 프레임 안에서 능동적으로 의미를 구성하도록 했다. 이는 마당극과 마을영화와의 중요한 차이를 드러낸다.

마당극은 관객의 참여를 포함하지만, 그 참여는 주로 추임새와 막판의 어울림에 국한된다. 이미 완성된 이야기 구조 안에서 관객은 제한적으로만 작동한다. 참여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어깨를 들썩이거나, 프레임의 틈새에서 몇 마디를 보탤 수 있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마을영화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누에를 마을,사람들 ,관계,공동체의 정서에 둔다 .

참여자의 위치: 아마추어와 허무주의자 사이

토론 중 핵심적으로 떠오른 질문은 참여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느냐는 점이었다. 참여자를 정치적, 사회적, 예술적 아마추어로 보는 관점은 그들을 능동적 존재로 격상시키기보다는 한계를 부여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종교적, 자연적 허무주의자로 바라보는 관점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보편성을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마을영화의 독창적 가치는 두 관점 사이의 긴장 속에서 피어난다. 참여자는 단순히 연출된 프레임 안에서 소비되거나, 그 자체로 신비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이 가진 무의식적 경험과 목소리를 통해 스스로 이야기의 주체가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권력을 완전히 이양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한 이양은 무의미하다. 예술적‧정치적 권력의 유연한 분배가 필요하다.

즉흥과 우연의 미학

강희진 작가가 말했듯, 마을영화는 기존 작품과는 달리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주지 않는다. 이는 즉흥성과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기존의 계획된 예술과 대비된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즉흥과 우연 속에서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열었던 것처럼, 마을영화는 참여자들에게 이야기의 통제권을 은근히 넘기며 새로운 형태의 예술적 경험을 제공한다.

즉흥성과 우연성은 계획된 예술과 충돌할 수 있지만, 이 둘은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 영화는 이 관계를 다루기에 적합한 매체다. 무대 위에서 이미 춤출 준비가 된 자들만을 허용하는 안은미류의 참여 무용과 달리, 마을영화는 보다 넓고 유연한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

마을영화의 메시지와 방식

마을영화는 메시지를 주는 방식에서도 독특하다. 기존 예술이 작가의 세계관에서 주제를 제시하고 이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마을영화는 일상을 사는 참여자들의 삶 자체를 메시지로 전환한다. 김찬연(전문번역작가)이 언급했듯이, 마을영화는 메시지를 은근히, 이슈 없이, 그리고 되바라지지 않게 전달한다. 이는 참여자들에게 일상 속에서 메시지를 찾고 이를 표현할 자유를 부여한다.

마을은 유령인가, 그늘인가?


경인여대 김태경 교수의 말처럼, 마을영화는 단순히 생태적 귀환(에어컨에서 그늘로 돌아가는)으로 이해될 수 없다. 마을은 단순히 공동체적 가치나 “마을 만세”의 구호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한 긴장 관계 속에 존재한다. 때로는 유령처럼 보이며, 실체를 잡기 어렵지만 동시에 그늘처럼 보호와 쉼을 제공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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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영화는 이 긴장 속에서 존재한다. 마을을 유령처럼 탐구하고, 그늘을 찾는 참여자들에게 열린 공간을 제공한다. 이는 인간의 본질과 공동체의 경계를 탐구하는 독창적 예술로 자리 잡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결론: 열린 그늘을 향하여

마을영화는 단순히 기존 예술의 틀을 벗어나기 위한 실험이 아니다. 이는 참여자들에게 스스로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표현할 기회를 제공하는 새로운 형식의 예술이다. 마당극, 브레히트 연극, 참여 무용과의 비교 속에서 마을영화는 그 독창성과 가능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사전 프레임을 깨고, 권력을 유연하게 이양하며, 참여자 스스로 열린 “그늘”을 찾도록 돕는 것이다. 이는 예술이 단순히 말과 글, 영화로서 그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 스스로 그늘을 형성해가는 과정에 기여하는 예술적 영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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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선언


이동극장 NO.2.


시가지와 부유한 동네와 가난한


동네와 작은 마을들,


전 세계를 운전하며 다녀라


그러니까 한마디로


파블로 피카소를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라.




미셀푸코는 미학적인 이미지나 공간을 이르는 헤테로토피아라는 표현을 했다.


유토피아가 없는 공간을 의미한다면, 헤테로토피아는 있는 공간이다.


마을 하면 보통 생각하는 이익사회나 시골, 공동체 같은 낭만적인 마을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예술이 영상을 통해 하나의 독특한 공간이


된다. 나는 신지승 감독의 트럭극장이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이라고 본다.


(백용성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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