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아이가 기말고사를 앞두고 역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암기 위주의 교육에 길들여졌던 한 사람이었고, 역사란 과목은 그 당시는 나에게 어떤 사유의 기회도 주지 못했다. 교실 속 선생님의 강의는 대부분 교과서를 재탕하는 수준이었고, 그 안에서 역사는 건조하고 추상적인 정보의 나열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아이가 보고 있는 역사책이나 시험공부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한나라의 무제는..."으로 시작하는 주어 중심의 서술, 정책과 대외 영향에 대한 분석은 여전히 대동소이했다. 무엇이든 더 알고 싶다면 개인적인 학습을 통해 스스로 심화하라는 구조 또한 바뀌지 않았다. 몇 년 전 아이들과 함께 항우(項羽)와 유방(劉邦) 싸움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항우는 여러 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마지막 싸움에서 단 한번 패배하며 결국 자결했다. 그 이야기는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성어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래"라는 뜻으로, 완전히 고립되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 끝내 항복하지 않고 자결한 항우의 기개. 하지만 애써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나는 단 한 번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만 항우의 태도를 조롱하였다. 역사 교육이 디테일과 해석없이 개론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곧 왜곡된 추상화와 다름없다. (물론 개인이 다다를 수 있는 역사의 디테일이라는 것도 한계가 없을 수 없다) 역사는 왕과 소수의 서사에서 참여한 다양한 개인 중심의 서사를 빠뜨려서는 안되겠지만 지면과 시간의 한계로 인해 가장 중요한 민초들의 이야기가 빠뜨려지게 된다 .. 오늘날의 역사 교육은 여전히 ‘개요 중심’이라는 이름 아래 주요 인물과 구체적 사건의 맥락을 생략하고, 왕과 제도 중심으로 역사를 단순화한다.
이것은 개요가 아니라 개인과 민초를 지운 추상화다.정책은 왕이나 소수에 의해 생산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당대 사회와 백성들의 삶에서 우선적으로 비롯된다. 춘추전국시대 민초들의 삶이 어땠는지, 왜 그 시기에 다양한 사상가들이 등장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교과서에 보이지 않는다.
주나라 왕권 약화 제후국간의 전쟁 '우경으로 인한 농업 생산력 증대, 상공업 발달 신흥세력의 등장 혼란 스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통치방법의 등장 '이라고 적혀있다 .
아이들에게 어떤 구체적 상상력이 전달될지 궁금하다. 법가는 ‘법(法)’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 법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권력자들이 백성을 억누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고, 벌을 통해 두려움을 주는 방식으로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유가는 ‘예(禮)’와 ‘효(孝)’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 예절은 원래 깨진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었고, 결국 윗사람에게 무조건 복종하라는 규칙이 되어 백성 위에 덧씌워졌다.
묵가는 ‘모두를 사랑하라(兼愛)’는 말을 앞세웠지만, 실제로는 싸움을 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쟁을 효율적으로 막거나 수행하는 데 더 많이 쓰였다.
병가는 ‘전쟁을 잘 이기는 방법’을 연구했는데, 그 전략은 결국 상대를 빠르게 제압하고 지배하기 위한 무력의 기술이었다.
심지어 도가(道家)는 ‘자연스럽게 살아가라’는 말로 정치의 간섭을 피하고 자유를 추구했지만, 그것이 현실에서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불의한 세상을 외면하는 핑계로 쓰이기도 했다.
그 모든 사상은 실제적으로 백성들을 평화롭게 살게 하기 위한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역사의 시작이었다.
권력 세력들이 무당층을 동원(징병제)하기 시작한 역사적 순간이었으며 민초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위한 기만적 지식논리의 필연적 등장이었다.
그들은 체제의 모순과 백성의 고통을 누에 삼아 태동했다.제자백가사상은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게 목적이 아니라 왕을 위한 논리를 정제해 바치는 사상 노동자들이었다.
춘추전국은 사상의 황금기가 아니라, 사상이 국가의 도구로 전락한 흑철의 시대였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이란 이름의 찬란함과는 다르게 백성들의 피로 물든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다.
백성의 살과 눈물 위에 세워진 학문의 탑이기에, 우리는 이 시기를 찬탄이 아니라 비판으로도 읽어야 한다.
전통적인 중국사 교육에서는 ‘한 무제의 대외 팽창 정책’이라는 틀 아래 흉노(북방 유목민족) 와의 전쟁을 간단히 정리한다.
이 설명 속에는 곽거병도, 장건도, 전략도, 지리도 없다. 마치 모든 역사적 변화가 황제 한 사람의 의지로만 이루어진 것처럼 서술된다.
이런 방식은 학생들에게 왕 이외의 어떤 인간도 역사에 개입할 수 없다는 너무나 위험한 역사관을 심어줄 위험이 있다.
시대는 이미 ‘왕-시민-개인의 근대’로 이행했건만, 교육은 여전히 개인 인간을 지운 퇴행적 서술에 머물러 있다.
곽거병은 흉노를 상대로 단순한 무력 충돌이 아닌, 경무장 기병 중심의 전격전, 기습 전술, 보급로 관리, 우회 침투 등 정교한 전략을 펼쳤다. 유목 민족의 기동력을 역으로 이용한 그의 전투는, 단순한 명령 이행이 아니라 현장의 판단과 창의성, 인간적 리더십이 작동한 결과였다.
이러한 전략을 지도와 전투 흐름으로 시각화해 교육한다면, 학생들은 전쟁의 복잡성, 인간의 역할, 지리적 맥락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 배틀그라운드 게임을 하며 자라는 아이들에게 곽거병의 전략은 훨씬 감동적으로 다가올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도 곽거병보다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한무제만 여전히 존재하는 역사교과서를 배운다. (뜬금없는지 모르지만 동학의 우금치 전투 또한 창 낫 화승총 등 전통 무기를 가지고 일본의 기관총과 최신 소총에 전면대적하라고 지휘한 동학 지휘부는 도대체 제정신이었던가 ?
항우의 미친 기개만을 칭송하며 민중들의 피를 역사의 제단에 받치는 투쟁의 사대전통은 여전하고 계속 이어질 지 모른다 . 한 무제의 흉노족을 격퇴한 건 곽거병 지략의 승리이지 한 무제의 능력이 아니다 )
비록 책상 위 암기공부를 못하더라도, 목동 일을 하던 곽거병 같은 사람도 명장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물론 연 낙하산이었지만 ) 역사는 그런 입체적인 삶의 이치를 가르쳐야 한다.
사마천 역시 오랜 여행을 통해 개인의 안목을 확장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사기』라는 역사서를 완성했다. 와신상담보다 더한 복수의 화신이, 역사라는 도구로 고차원적이고 색다른 복수를 한 사마천의 이야기를 그 당시의 나도 오늘의 우리 아이들도 배우지 못하고 영감 받지 못하고 있였다. 이 모든 것이 사라진 채 단지 '사마천의 사기'라는 제목과 간단한 내용만 외우게 한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나 또한 그랬다. 사마천의 『사기』, 헤로도토스, 일리아드, 오디세우스— 그 이름들을 외우는 데 급급했지, 그들이 전하려 한 삶과 인간, 그리고 실패와 회복의 이야기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역사를 통해 칠전팔기의 의미를 배우고, 내 삶 속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게 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 교육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 암기식 지식 전달이 아니다. 개인의 삶과 판단을 통해 역사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방식, 살아 갈 이야기로서의 역사 ,평범한 삶의 지혜와 건강함을 추동할 역사교육이다.
춘추전국 시대를 권력 다툼의 구경꾼이 아니라, 동원된 민초의 시선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당층의 고단한 삶, 겨우 스무살의 어린 무제가 만든 전쟁으로 인해, 온 백성이 유랑민이 되고 그 절반은 죽었으며 풍작에도 기아에 허덕이며, 서로 아이를 바꿔 먹어야 했다고 전해지던 그때 백성들의 찌라시는 왜 볼 수 없고 강조하지 않는가? 평범한 이들에게는 참혹함만을 남긴 역사를 왜 아직도 아이들에게 이런 방식으로밖에 전달하지 못하는가?
그 모든 것이 ‘한 무제의 업적’이 아니라, 민초들의 삶에서 비롯되고 권력에만 집착한 소수 인간들의 행위가 불러온, 힘 없는 다수의 민초들의 고통으로 귀결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는 것. 그것이야말로 특히 무당파 중심의 역사 교육이 필히 가야 할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