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른 김장하의 "요란한 소수가 조용한 다수를 지배한다"라는 말이 신선한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요란한 소수가 지배하는 왜곡된 정치상황을 수정할 지도자가 나타나겠지요"라는 문형배의 답변은 어른 김장하의 질문만큼 심리적 보상을 주지 못한다.
《공포의 보수》라는 오래된 영화가 있었다. 남미의 어느 가난한 오지 마을. 무직자, 떠돌이, 도망자, 절망한 유럽인들이 모여 살아간다. 이 마을 근처에는 미국계 석유회사가 운영하는 유전이 있는데, 어느 날 유전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발생한다. 화재를 진압하려면 니트로글리세린(초강력 폭약)을 유전까지 트럭으로 운반해야 한다. 그러나 도로는 험준하고 트럭이 조금만 흔들려도 폭발해 죽게 된다. 석유회사는 이 임무를 맡을 자원자를 모집하고, 막다른 인생의 사내들이 거액의 보수에 이끌려 나선다. 마리오 (이브 몽탕): 파리에서 온 젊은 떠돌이, 조: 노련하지만 쇠약해진 사기꾼, 루이지: 의리 있지만 병든 이탈리아 노동자,비임바: 과묵한 독일인
이들은 두 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니트로를 싣고 200km의 죽음의 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길은 평탄하지 않다. 무너진 다리, 기름 유출, 바위산, 진흙탕… 사소한 흔들림조차 폭발을 의미한다. 육체적 위험뿐 아니라, 인간 내면의 탐욕, 두려움, 갈등도 점점 폭발 직전에 다다른다. 자본이 설계한 죽음의 도로
감독 앙리조르주 클루조의 1953년 영화 "공포의 보수"는 단지 한 편의 서스펜스 걸작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 정치가 자본의 최소한의 관리 기제로 전락하고, 권력의 방향마저 자본에 의해 제어되는 현실을 예감처럼 제시한 정치적 알레고리이다.
영화가 만들어 진지 70년이 넘었지만 그 상징하는 바가 예사롭지 않다.
솔직히 인간 개개인의 삶과 죽음은 더 이상 정치 공동체의 문제도, 사회적 연대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자본의 필요와 효율에 따라 배치되는 ‘관리 가능한 변수’에 불과해져 버린 시대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도로 위의 비포장 굴곡, 니트로글리세린의 불안정성, 고갯길의 낙석, 바퀴의 미끄러짐, 심리적 공황, 동료의 탈진과 죽음처럼, 사물과 환경, 감정과 리듬 속에 분산된 형태로 작동하는 정치통치 장치다.
이 장치들은 인간 개개인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붙이며, 그 통과를 생존의 목적처럼 위장한다. 그러나 실상은 이미 실패가 내재된 구조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 길은 인간을 소모하고, 자멸로 이끈다. 결국 살아남은 자조차 허무와 허탈 속에서 사고사로 생을 마감한다. 보상은 없다. 기념도 없다.
단지 최종적으로 자기의 격에 맞는 고급 중급 하급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일 뿐이다.
이처럼 "공포의 보수"는 현대 정치가 자본이라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최소한의 관리자, 혹은 정당화 도구로 전락하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국가는 더 이상 개인 국민을 보호하거나 주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단지 추상적인 국민과 주권을 교묘하게 봉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오히려 자본이 설정한 위험 구조 속에서 "죽음의 선택지"를 제시하며 도덕적 정당성만 덧칠할 뿐이다.
오늘날 비정규직 외주화, 위험의 민영화, 산업재해의 구조적 반복은 모두 이와 같은 ‘자본의 고갯길’을 현실 속에 재현한다. 그 길 위에서 일하는 자들은 마리오처럼 주체인 척하지만, 실은 아무 권력도 없는 운전자일 뿐이다. 그들에게 남겨진 정치란, 오직 생존을 향한 무의미한 질주와, 그것조차 보상받지 못한 채 끝나는 절벽 낙하뿐이다.
불평등한 세계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생명을 종교 삼아 살아가는 모든 인간 군상의 은유다.
트럭은 달리고, 니트로는 흔들리고, 바퀴는 언제든 미끄러질 수 있다.
감독 클루조는 말없이 경고한다:"이 세계는 정치가 실종된 곳에서, 자본이 통치의 형식을 빌려 만든 도로 위에 세워졌다."
"요란한 소수"는 여전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어떤 위험과 어떤 희망이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고 어떻게 경제적 양극화와 저출산이 해결될 것이며 어떻게 우리 아이들이 군대에서 폭력 당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 아이들이 돈이 없어도 대학을 가서 학문에 집중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나이 든 맨파워인 노인들이 일자리와 복지를 '스스로' 마련할 수 있을 것인지.. 이제 한국 속의 개인이 아니라 망망대해 같은 글로벌 속의 1인이 되어버린 우리 존재가 세계 속에서 미국과 스위스, 중국등 세계강국처럼 문명의 기적을 이루어 낼 수 있을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 소비적인 좌우비난이 아닌 희망찬 토론을 이끌어 낼 그런 화두를 던질 고승 같은 지도자는 없을까? 어른 김장하의 말처럼 '요란한 소수'가 아니라 '혁명적 소수'가 출현해 줄 수는 없는가? 자본주도의 문명에서 정치의 역할은 이전과 다르다. 경제적 양극화, 저출생 고령화사회, 남북관계, 노인문제, 정치적 양극화, 기후환경, 지역소멸문제 등에서 있어서도 너무나 뻔하고 이미 3년 전 심지어 7년 전 선거에서 제시하고 있었던 상식적인 선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실속 없이 요란스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