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중
처음엔 그저 동네 아저씨들이 담배 피우러 모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동네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근처 아파트에 사는 이들, 옆 동네에서 온 이들, 심지어 오래전 이 동네에 살다가 이사 간 이들도 다시 이곳으로 와 엇비슷한 연배의 옛 친구들을 만났다.
가끔은 여기에 살다 이사를 가서 먼 데서 버스를 타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이 동네 담배 명당이면서 , 그들만의 아지트. 지나가는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기도 하지만, 내겐 오히려 낯설고 귀한 풍경처럼 느껴졌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금정산에서 내려온 개울이 학교 앞 마을을 가로질러 온천천으로 흘렀다. 그 개울은 여름이면 아이들의 물놀이터였고, 아낙들이 빨래를 하며 누군가는 다리를 개울에 걸쳤을 것이다. 하지만 개울은 복개되고, 도로가 되었다.
개울 옆 땅을 가진 이들은 건물주가 되었고, 금정산을 병풍처럼 막아선 아파트들이 마을 풍경을 뒤덮었다.
이제 반쯤 남은 마을은 아파트로 포위되어 너무 면적이 작아 재개발도 여의치 않아 듬성 듬성 빈집이 더 많은 동네가 되었다.
복개된 도로 위로는 하루에 몇 시간, 겨우 햇빛이 스친다.
그 빛이 골목 입구에 닿을 때, 하삼동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든 그들이 모여 함께 담배를 피운다.
마지막 흡연 세대의 시위처럼, 그들의 담배 연기는 이 동네에 사람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린다.
마치 봉화처럼.
나도 그 시간쯤 담배를 사러 나간다.
큰길 맞은편 가까운 마트가 아니라, 일부러 한 블록 더 돌아 두 번째 블록의 마트로 간다.
그 이유는 가까운 마트 2층엔 요양병원이 있고, 그 창가에 우리 아버지가 누워 계시기 때문이다.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을 시선이 그곳을 피하게 한다. 담배를 사러 가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요양병원 창문으로 보이는 길과 그 반경을 알게 된 뒤로, 나는 그 시선을 피해 4배가 되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골목 아저씨들이 한마디 거든다.
“이쪽 길로 돌아서 신호등 건너면 병원 창문에 안 보여.”
“그래도 쫄려요. 성격이 호랑이라, 들켜도 안 들켜도 부담이에요.”
그 말에 누군가 맞장구를 친다.
“우리 아버지도 불같은 성격이었지. 병적으로 완벽한 사람. 그 성격 덕에 돈은 많이 벌었어.”
“유산 많이 받으셨겠네요.”
“나 재산세만 300만 원씩 내던 사람이었다니까...”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뭔가 사연이 느껴지지만, 묻지 않았다. 그저 더 궁금해질 뿐.
“그 뒤로는 그냥 다 비웠어. 점집에 갔더니, 나 보자마자 한숨 쉬더니 그러더라고. ‘목숨값이라고 생각해.’ 기가 막히게 맞추더라.”
옆에 있던 남자가 힘없이 중얼거린다.
“나는 아버지 얼굴도 몰라. 세 살 때 돌아가셔.”
그는 동네 철물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제주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이후 50년대 초 부산 영도로 이사와 60년 넘게 살아왔다.
묻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4.3의 그림자가 없진 않을 것 같았다.
“근데 눈이 왜 그래요?”
누군가 다래끼가 난 남자에게 묻는다.
“어릴 땐 다래끼 나면 속눈썹 뽑아서 길에 두고 돌로 덮었어요. 그 돌 밟은 사람한테 옮겨간다고.”
“우린 까마중 열매 따다가 눈에 문질렀는데.”
“요즘은 병원에서 따뜻한 달걀로 지지라고 하더만요.”
누가 옳고 그른지는 몰라도, 저마다의 경험들이 연달아 터져 나온다.
이 골목에 모인 이들, 대부분 칠십을 넘겼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를 감수하면서까지 담배를 피우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그들에게 이곳은, 담배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 누구에겐 마지막 연결, 누구에겐 위로를 받는 자리.
그리고 서로만이 알아듣는 삶의 언어들. 나에겐, 십 년 후에도 이런 연결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들이 담배 피우는 사이 담벼락에 카메라를 올려두고 그 시간을 찍어간다.
어느덧 그들도 흔쾌히 용인하고 있는, 그들의 흡연 같은 나의 일상이다. 담배 연기 사이로 흩어지는 이야기들. 그건 그냥 연기가 아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도시의 골목에서 조용히 꺼내놓는, 오래된 동네의 삶을 추억하려는 봉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