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단지 믿음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 행동과 사회 구조의 깊은 근간이다. 따라서 특정 종교를 가진 사회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태도, 삶의 리듬, 사회적 행동은 교리보다 문화적 맥락에서 더 많이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내 주위를 보면 불교, 기독교, 가톨릭 종교공동체의 문화가 개인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기반은 단지 종교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일상생활과 사회관계 전반에 깊숙이 작동하고 있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자라난 기성세대와는 달리 최근의 MZ세대는 한국 민주정치의 진화와 민주적 문화에서 비롯된 점이 크다. 이 세대는 정치적 권위보다는 관계성과 참여, 문화적 경험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려 한다. 당대의 정치권력과 정치문화가 주는 영향도 그래서 중요하다. 하지만 생활 속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요원하다. 제도적 민주주의는 진전되었으나, 문화와 일상의 차원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가부장 문화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1992),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변화시킨 '모래시계' 등과 같은 드라마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 든다. 이들 작품은 정치적 담론이 일상으로 들어오는 과정, 문화가 사회적 인식 변화를 촉진하는 힘을 보여준다.
감정화와 양극화, 공격성, 적개심, 당파결속력 등 정치가 삶의 영역에 감정적으로 개입하고, 친구·가족 관계에 정치적 성향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단순히 의견 차이를 넘어, 정체성의 대립으로까지 확대되는 이 분위기 속에서, 이제는 정치가 일상에 어떤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가보다, 일상 공동체에서 어떤 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해야 할까를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는 정치적 갈등을 넘어서기 위해 우리가 공유해야 할 새로운 사회적 토대를 모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정치, 종교, 주류문화에 의존해서 풀기에는 그 한계에 도달했다.
수평적 관계 문화, 생활 속에서 민주적이고 책임 있는 문화가 정착될 때, 정치도 그 문화를 반영하게 된다. 문화는 정치의 결과물이자 원인이며, 공동체는 단순히 ‘행정단위’가 아니라 ‘문화적 훈련소’이자 ‘윤리적 실험실’이 되어야 한다. 이제는 정치를 논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문화를 조직해야 할 때다.
나는 그것을 위한 영화가 마을영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결국 말 많은 사람, 기센 사람들이 토론을 장악한다. 지역 작은 커뮤니티 또한 중앙정치의 완장들이 포진해 버린 지 오래이다. 정치적 공간이 아니라면 이런 현실에서 진정한 자발성과 평등성은 어디서부터 훈련하고 교류해야 할까?
정치적 토론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기에는 이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어떤 탈정치예술이 이 문제에 개입할 수 있을까? 탈정치예술이 과연 실질적인 사회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절박한 정치문화에서 민주주의 훈련의 가능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예술문화는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서로를 이해하며, 공동의 미래를 설계할지를 실험할 수 있는 유연한 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느냐는 곧,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에 대한 실천적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을영화는 단순한 영상 콘텐츠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연기하고, 만들어가는 민주적 실천의 장이다.
마을영화에는 일인 감독 중심이 아니다. 누구나 감독처럼 작품에 대한 훈수를 들 수 있다. 분화된 지휘 체계가 아닌, 참여자 각자의 개성과 경험이 마을의 공간인 용광로에서 창작의 출발점이 된다. 이는 민주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가치인 ‘평등한 목소리’를 전제로 한다. 시간에 쫓겨 촬영을 서두르거나 거리를 통제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자신의 개성을 꺼낼 수 있고, 이야기를 누구나 제안할 수 있다. 공동의 토론을 통해 이어지고 발전한다.
마을영화에서는 캐스팅 오디션도 없다. 외형적 조건이나 연기력보다, 이야기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자기 삶으로 풀어낼 수 있는 ‘주체’가 연기를 맡는다. 참여에 따라 그 배역이 길어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다. 이는 문화적 참여의 문턱을 낮추고, 구성원 모두가 창작의 주체로 설 수 있게 한다. 즉, 마을영화는 문화의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 모두를 끌어들이는 민주적 매체다.
이러한 점에서 마을영화는 소수만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전통적인 문화행사는 기획자나 전문가, 예술가 몇몇이 이끌고 다수가 수동적으로 참여 혹은 관람하는 구조로 흘러가기 쉽다. 하지만 마을영화는 ‘모두’가 참여한다.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정치·종교를 가져도 영화라는 틀 안에서는 격론하고 공존할 수 있다. 이처럼 문화는 갈등을 분열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논쟁 속에서도 공동체로서의 감각을 회복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다양한 세대와 삶의 조건을 지닌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로 공동체 내 창작과 표현의 과정을 함께 한다. 누군가는 이야기의 단서를 제공하고, 누군가는 연기를 하며, 누군가는 촬영이나 의상, 공간을 준비한다. 이 과정 속에서 공동체는 단순히 ‘함께 있는 사람들’을 넘어 ‘함께 만드는 사람들’로 바뀌며, 문화의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 서게 된다. 이것은 일상의 민주주의 훈련이다.
마을영화는 단지 영화 한 편을 만드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공동체가 민주적으로 사고하고, 결정하고, 실행해 보는 하나의 실천적 실험이다. 행정에 의한 조직이 아닌, 문화에 의한 자발적 협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는 바로 공동체가 ‘문화적 훈련소’이자 ‘윤리적 실험실’이 되는 이유다. 함께 고민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과정을 통해, 구성원들은 자연스럽게 민주적 감수성과 윤리적 주체성을 배우고 익힌다. 그리고 이것이 반복되고 축적될 때, 문화는 개개인에게 작은 영향을 미친다.
지금 우리가 마을영화, 토종로컬영화를 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순히 영화를 ‘다르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자 대답이기 때문이다. 관객으로만 존재하던 이들이 배우가 되고, 이야기꾼이 되고, 감독이 되는 순간, 공동체는 스스로를 문화적으로 조직하며 그 문화는 곧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문화가 정치의 선행 조건이자 사회를 바꾸는 실질적 도구가 될 수 있는 이유다. 마을영화는 나에게는 그 시작점이었다. 무려 20년 전부터.
태백 구문소 마을영화 출연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