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를 단절하는 교육은 누구에게 활용되고 있는가?

by 신지승



교육은 유전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교육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연과 본성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물론 교육은 정보를 전달하고, 특정한 기술을 익히게 하며, 어느 정도는 행동을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성향, 삶의 태도, 사고방식, 감정의 결은 교육이 아니라 유전자가 만든다.이 유전은 생물학적이면서 문화적인 것이기도 하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인류의 역사 속에서 바뀌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본능과 기질이다. 공격성과 회피성, 욕망의 크기, 감정적 반응의 속도, 불안과 우울에 대한 민감성은 태어나고 유연기 때 많은 부분 결정된다. 부모의 얼굴뿐 아니라, 부모의 사고 패턴, 감정 반응, 심리적 취약성까지도 물려받는다. 이러한 유전적 연속성은 단지 생물학이 아니라, 운명 그 자체다.


현대 심리학과 신경과학은 점점 더 많은 증거를 내놓는다. 어떤 아이는 아무리 사랑받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라더라도, 내면의 불안과 충동을 이기지 못한다. 어떤 이는 아무리 가르쳐도 집중하지 못하고, 어떤 이는 아무리 도덕을 배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는 교육의 실패가 아니다. 교육이 애초에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뜻이다. 유전의 기질은 교육보다 오래가고, 더 깊다. 이건 교육무용론이 아니다. 오히려, 교육이 닿을 수 없는 그 심층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교육이 비로소 현실적인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인간은 결국 자신의 유전된 본성대로 반응한다. 마치 컴퓨터가 잠깐 다른 프로그램을 돌리다가 결국 기본 설정으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변할 수 있다'는 말은 교육의 이상주의자들이 붙잡고 싶은 희망일 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차갑다. 변화하는 사람은 유전적으로도 변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교육은 그들을 ‘발견’할 뿐,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결국 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은 변화 가능한 기질을 지닌 사람에게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에 그친다.

우리는 여전히 혈통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게 반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압도적으로 결정한다. 극복, 초월, 변화 — 그런 단어들은 일부 예외적인 존재들에나 어울리는 환상일 뿐이다.

오히려 교육이 유전의 한계를 인정할 때, 진정한 현실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 든다. 모두를 똑같이 만들 수 있다는 허망한 꿈을 버리고, 각자의 타고난 성향에 맞는 최소한의 조정만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을 파괴하지 않는 교육의 길이다. 여기서 ‘조정’이란, 보편화된 교과 내용을 주입하기보다, 개별 기질의 흐름을 고려한 경험적 접근과 관계적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유전은 교육보다 깊고 오래가며,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의 가장 정직한 기억이자, 가장 잔혹한 진실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운명 지워져 있지만, 모든 것은 가능하다

모든 것은 운명 지워져 있다. 하지만 그 말은 단지 숙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는 또 다른 층위의 가능성이 숨어 있다. 운명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지도의 크기를 설정한다. 그 안에서 어디로 향하느냐는 개인의 몫이다. 인간이란, 정해진 강물의 물살 속에서 노를 젓는 존재다. 역류할 수는 없지만, 방향과 속도는 조절할 수 있다.

교육은 그 노 젓는 방식을 알려줄 뿐이다. 그러나 강의 굽이와 폭, 물살의 세기와 물의 깊이는 이미 유전으로 주어진 것이다. 어떤 이는 넓고 완만한 물줄기를 타고 태어나고, 어떤 이는 거칠고 급한 물살 속에 내던져진다. 교육은 수영법을 알려주지만, 그 바탕의 조건을 바꾸지는 못한다.

이 점에서, '모든 것은 가능하다'는 말과 '모든 것은 운명이다'는 말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가능한 모든 것들은, 사실은 이미 정해진 구조 안에서의 가능성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푸른 하늘이 열려 있다 해도, 뿌리 깊은 나무는 걷지 못하고, 지느러미 달린 물고기는 하늘을 나르지 못한다. 그들의 한계는 바로 존재 자체의 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그 틀 안에서는 무한한 변주가 가능하다. 우리는 스스로의 유전적 구조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의 고귀함은, 자유롭게 변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변할 수 없는 조건을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나아가려 하는 그 의지에 있다.우리는 정해진 강물 속에서 최선을 다해 방향을 잡는다. 그 방향은 당대의 교육이 만든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유전이라는 거대한 설계도를 가지고 시작한다. 이 유전은 우리의 기질과 성격, 지능, 감정의 패턴까지도 미세하게 각인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차분하고, 어떤 사람은 격정적이며, 누구는 타고난 논리력을 갖고, 누구는 감각적 창의성에 뛰어난 것도 이러한 유전의 작용이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히 유전자의 지배만 받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며, 그 물음은 자신을 유전적 틀에서 끄집어내는 첫 번째 열쇠가 된다.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 운명을 조정하려는 주체가 된다. 그러나 그게 쉽지도 않고 확률적으로 높지도 않다.

교육이란 바로 그 자각의 문을 여는 작업이어야 한다. 학교교육은 이미 그 가능성이 낮다. 오히려 새로운 경험, 다양한 관계, 낯선 질문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반복하던 방식에서 벗어나고,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다른 선택을 가능케 한다. 더 중요한 건 기존 부모, 기존의 환경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관계의 형성이다. 스승이든 친구든, 혹은 어떤 종교적 멘토든, 인간은 스스로에게 새로운 ‘부모’를 부여할 수 있다. 그 관계 속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고, 다시 배우며, 다시 성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관계의 재구성’이고, ‘심리적 재출생’이다.

어릴 적 환경과 관계가 조기에 다양화될수록 유전적 한계는 무뎌진다.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일란성쌍둥이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렇기에 사회화는 유전의 굳건함을 흔드는 결정적인 변수다. 새로운 언어, 감정, 감각의 회로가 자라나는 뇌 안에 형성되며, 인간은 자신이 원래 어떤 존재였는지를 넘어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발견한다. 그런데 그것은 학교에서도 가능하지 않고 아카데미에서도 가능하지 않고 사교육에서도 기대할 수 없다.

스스로 변화하고자 하는 자발적 의지, 다시 말해 자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어렵고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이미 사회가 학교처럼 당대의 서열과 계급질서 아래 일사불란하게 열중쉬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직된 구조 속에서는 자각을 유도하는 질문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을 도와주고 일깨워 줄 사회적 장치가 매우 부족하다. 예술가들이 해낼 수 있을까? 사회 봉사자들이 가능할까? 종교가 해 낼 수 있을까?

모든 사회적 주체들은 매너리즘, 귀차니즘에 빠져 있고 모든 것은 허당처럼 제 역할과 기능을 못하고 있다. 제도는 기능을 상실했고, 개인은 지쳐 있으며, 공동체는 단절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길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라지만 과연 우리 중 몇 퍼센트가 이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유전의 족쇄를 끊어버릴 수 있도록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재구성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매번 재탄생의 무대로 만들고 그 모든 변화의 출발점으로서의 자각을 유도할 수 있는 주체의 문제가 사실 따지고 보면 교과서적으로는 맞지만 아주 비현실적인 대안이다. 현실의 장벽은 이성적 이상보다 두텁고 견고하다.

그렇기에 스스로 찾지 않도록, 찾아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돈벌이 문화의 강렬한 욕망, 그 능동성 또한 큰 장애물이다. 이 장애물은 단순히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무기력과 타성으로 작용한다.

그 장애물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강렬하고 역동적이면서 개인적인 개성이 보장되는, 민주적이면서 참여적인 예술 활동이 필요하다.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수동적이지 않을 수 있는 틀의 생활공동체 예술로서의 영화가, 바로 '마을영화'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소수가 모여서 설정된 시나리오에 근거해서 연기하고 촬영하고 편집하는 그런 영화 과정이 아니다. 마을의 공간에서 마을의 아이들, 노인들, 끼가 많은 이와 재능이 없는 이들, 지식을 가진 이와 지식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광장과 마당에서 서로 연결되고 관계하는 과정이 있는 예술, 그 자체가 교육의 대안이며 인간 변화의 진정한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공간이 필요하다.

나는 여전히 이 영화 세대초월적 마당영화가 가지는 과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이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서 닿을 수 있는 가장 쉽고 가장 소박한 공간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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