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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영화는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삶의 리듬과 관계, 존재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다시 던지는 하나의 철학적 실천이다. 마을영화가 탄생한 배경에는 서양철학의 몇몇 중요한 사유의 줄기들과 맞닿는 지점이 있다.
마을영화는 특정한 ‘장소’에서 시작된다. 도시의 익명성과 대형 실내 스크린이 아닌, 도시의 골목 ,마을 회관, 느티나무 아래, 도시의 벽면이 스크린이 되는 그 공간. 이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내-존재”의 구체적인 실천이기도 하다. 인간은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 마을영화는 이 ‘관계적 실존’을 촉발시키는 장치가 되도록 해야 한다 .
철학자 에드워드 케이시는 장소를 단순한 좌표가 아닌 기억의 저장소라고 말한다. 과거의 이야기, 감정, 노동, 공동체의 역사가 층층이 퇴적된 의미 공간. 마을영화는 이 장소와 삶의 역사성을 다시 호명하며, 단절된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감각의 매개체가 된다.
현대의 핫플레이스를 좇는 감각의 소비 대신, 마을영화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서로에게 함께 묻는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란 단지 권력의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자들이 보이게 되고, 말할 수 없던 자들이 말하게 되는 순간이라고 했다. 마을영화는 바로 그 정치를 실현한다. 사회의 끄트머리에 있는 도시마을의 노인, 아이들, 시골의 농부, 비전문가들이 단지 관객이 아니라 창작자와 주체가 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예술은 무엇을 보게 하고, 무엇을 들리게 할지를 통해 감각의 구조를 흔들고 새로운 감성의 지도를 만든다. 마을영화는 그동안 스크린에서 배제되었던 이들의 얼굴, 목소리, 삶을 전면에 드러내며 감성의 민주화를 이끈다.
이반 일리치는 기술과 제도가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보았다. 그의 ‘탈학교화’ 개념처럼, 마을영화는 제도적 예술 교육이나 거대한 제작 시스템 없이도 함께 영화를 만들고 나눌 수 있음을 증명한다. 사람들은 함께 모여 기획하고 촬영하고 상영하며, 공생적 자율을 경험한다.
존 듀이는 예술을 ‘경험’이라 했다. 감상이나 기술의 산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삶의 흐름을 응축하는 감각적 실천이 바로 예술이라는 것이다. 마을영화는 그 자체가 마을 사람들의 삶의 일부이며, 모든 과정이 공동체의 경험이 되고 곧 추억이 되며 역사가 된다. 아이들이 장기자랑을 하고, 주민들이 외국 감독과 막걸리를 나누며 웃는 그 순간들이 바로 듀이가 말한 참여 민주주의의 예술이었다.
마을영화는 작품 이전에 삶의 흐름이다. 질 들뢰즈는 존재를 ‘되기(becoming)’의 흐름으로 보았다.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연결되는 것. 마을영화는 장르나 기법보다도, 삶 속에서 생겨나는 이야기의 흐름, 그 자체가 영화다. 우리사회에서 이런 것이 가능하도록 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는가 ?
그 흐름은 리스모처럼 뻗어 나간다. 중심이 없고, 위계가 없으며, 누구나 연결되고 퍼져나간다. 그래서 이 마을영화에서는 참여하는 아이의 장기자랑도, 노인의 한 마디도, 누군가의의 눈물도 하나의 장면이 되고 서사로 연결될 수있다 .그것은 총감독과 주민들이 함께 바느질하는 퀼터작업이다.
아그네스 바르다처럼 마을영화는 경계의 허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와 허구, 창작자와 관객, 글로벌과 로컬의 경계를 허물고 삶과 영화가 구별되지 않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마을영화는 예술과 공동체, 존재와 장소, 정치와 감성, 삶과 영화 사이의 오래된 경계를 허문다. 그것은 단지 축제가 아니라, 삶을 다시 예술로 불러내는 실천적 철학이다. 그것은 아이들이 자신이 마을과 연결되었음을 자각하게 하고, 외국손님을 맞이하며 자부심을 느끼게 하며, 느티나무 아래서 상 하나를 건네는 감동의 순간으로 구현된다.
마을영화는 묻는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삶은 어디서 시작되고 영화는 어디까지 허락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답한다. 삶이 곧 영화이며, 영화는 공동의 삶을 환대하는 방식이라고.
왜 수십년동안 노력했지만 이 정도의 문화가 우리 시회에서 자리잡지 못하는가 ? 아쉽다. 한국에는 100여개가 넘는 마을에 마을영화가 만들어진 세계 유일무이한 역사가 있다.
참고
하이데거는 인간을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 규정했습니다. 이는 인간이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항상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철학의 핵심 개념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세계와 분리된 객체가 아니라, 항상 세계 안에 있음으로써 존재한다.
‘세계-내-존재’는 인간이 사물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언제나 상황 속에서 존재하며, 그 상황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존재 방식은 도구적 관계를 넘어서,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를 설명하는 핵심이다.
사회는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보일 수 있으며, 무엇이 예술로 여겨지는가를 정하는 감각의 체계로 구성됨. 이 체계는 보이지 않던 자들을 지워버린다.
정치란 단순한 권력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자들을 보이게 하고, 말할 수 없던 자들이 말하게 되는 순간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로, 감각의 구조를 흔들며 새로운 감각적 질서를 만든다.
예술은 직접 정치적 선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게 만들고, 무엇을 들리게 할 것인가를 통해
새로운 감성의 분할을 제안함으로써 정치적 행위가 된다.
도구의 전도(inversion of tools): 기술은 인간을 돕기 위해 존재해야 하나, 현대 사회는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탈학교화(Deschooling Society): 교육은 삶의 일부가 되어야지 제도화된 시스템에 종속되어선 안 된다.
공생적 자율(Social Autonomy): 사람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방식, 공동체의 리듬, 지식을 재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근본적 빈곤(Modernized Poverty): 전통적 자급능력마저 파괴한 현대문명이 오히려 더 깊은 의존과 빈곤을 만든다.
경험(Experience): 인간은 세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의미를 구성하며, 경험은 배움과 삶의 본질이다.
예술은 경험이다(Art as Experience): 예술은 감상이나 장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삶의 흐름과 감각적 응축이다.
참여 민주주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제도보다 생활 세계 속 참여와 연대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교육은 삶 그 자체: 학습은 훈련이 아니라, 문제 해결적 참여 속에서 공동체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되기(becoming): 존재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흐름이다.
리스모(Rhizome): 중심 없이 퍼지는 뿌리처럼, 비선형적·다중적 연결망이 사고의 모델이다.
소수적 문학(Minor Literature): 다수의 언어 안에서 주변화된 자들이 만드는 저항적 언어행위.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 반복 속에서도 똑같음은 없고, 항상 차이를 생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