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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사에 종속되지 않는 미시사

by 신지승


양대 거시사를 넘어서: 권력과 거리두기, 새로운 미시사의 탄생

오늘날 우리의 역사인식은 두 갈래로 진화되어 있다. 하나는 여전히 기득권 권력의 관점에서 세계를 정렬하려는 주류 거시사이고, 다른 하나는 이에 저항하는 대항 거시사다. 이 두 시선은 서로를 반박하고 비판하지만, 사실상 같은 프레임 안에 존재한다. 둘 다 '정치적 의미'와 '역사적 정당성'이라는 무게를 등에 지고 있으며, 대립과 정당화의 기획 속에 놓여 있다. 이런 구도에서 미시사는 종종 ‘선택’을 강요받는다. 어느 진영의 거시사에 기여할 것인가, 어느 쪽의 진실을 보조할 것인가.

그러나 이제는 이 양극 구도 바깥에서 작동하는 제3의 미시사가 요청된다. 그것은 어떤 거시사도 견디지 못할 작고 느슨한 이야기, 어느 정치적 진영에도 예속되지 않은 감정과 기억의 층위에서 출발한다. 이를테면 ‘말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 누군가의 경험, 누구의 역사적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주변인의 삶, 공적 맥락으로 호명되지 못했던 감정, 망설임, 일탈, 실패, 침묵, 무관심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미시사는 ‘승자’도, ‘저항자’도 아닌, 그 사이에서 오랜 시간 말없이 지나온 이들의 역사적 감각을 구성한다.

이 미시사는 ‘역사적 진영’이 아니라 ‘거리두기’를 통해 힘을 갖는다. 어느 진영에도 소속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함으로써 사유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미시사. 그것은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모든 거시사를 ‘의심의 대상으로 삼는’ 정치적 거리감각을 본성으로 갖는다. 역사와 정치, 문화와 권력의 촘촘한 망에서 스스로를 분리해 내는 이 미시사는 때로는 정치적 무위(無爲)의 위치에서, 역사를 다시 쓰는 가능성을 움켜쥔다.

가령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둘러싼 양대 서사, 즉 국가권력에 의한 시민들의 저항 해방 서사와 진압 서사 모두에 포함되지 않는 한 시민의 이야기가 있다고 치자. 그는 적극적인 저항자도, 국가폭력의 공모자도 아니었으며, 그저 거리를 피해 다른 도시로 도망쳤던 이였다고 하자. 그러나 그가 겪었던 공포, 죄책감, 회피의 서사는 어느 거시사에도 포섭되지 않는다. 역사소설 속 생명에 집착한 캐릭터로 잠깐 등장하는 소설 속 인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가의 상상에만 맡겨서는 미시사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 회피의 서사에서 우리는 거시사가 담지 못한 인간의 감정과 시대의 결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역사적 침묵’이 아니라, ‘거시사 바깥의 역사’로서 정당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미시사의 움직임은 문화민주주의와 더 깊이 연결된다. 문화민주주의는 다수성의 총합이 아니라, 누구도 타인의 기준에 따라 자신의 서사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을 말한다. 즉, 말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라, 침묵조차 서사가 되는 공간이 열려야 한다. 새로운 미시사는 ‘말해야 한다’는 강요를 넘어, ‘말하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진실을 사유하게 만든다. 그것은 타자성, 주변성, 사적 시간, 혹은 실패의 감각 같은 것들이 역사의 서사가 되는 방식이다.

더 이상 거시사의 병풍이 되지 않는 미시사. 더 이상 대항거시사의 조력자가 아닌 미시사. 그 미시사는 어떤 방향으로든 흐르기를 거부하며, ‘살아온 대로 말하고, 느낀 대로 침묵하며, 사라진 것들에 대한 슬픔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 우리가 새롭게 열어가야 할 문화적 민주주의의 과제에 있다.

진정한 미시사는 ‘모두가 말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라, ‘누구도 침묵으로 인해 지워지지 않는 역사’를 향한 끊임없는 사유의 여정이다. 권력으로부터의 거리, 진영으로부터의 거리, 심지어 역사의 강박으로부터의 거리. 이 세 가지로부터 벗어난 자리에서도 '무력한 거리두기'가 아닌 '적극적 거리'의 미시사도 이제는 필요하다.

역사의 스크린이 아니라 스크린 뒷면 심지어 스크린 주위의 구조와 풍경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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