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그리움을 위하여
박완서의 소설에서 끄집어낸 양극화
박완서의 단편소설 『그리움을 위하여』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나’와, 남편의 병수발로 인해 경제적·정서적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온 사촌동생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겉보기에는 따뜻하고 상호 호혜적인 자매애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경제력의 우월로 사촌동생의 힘을 빌리는 일방적이고 수직적이고 관계였다. '나'는 어쩌면 그런 관계를 어느 시점에서 성찰하게 된다. ‘나’는 도움을 받으면서도 '나'는 더 베풀고 도와주는 입장, 그 안에서 화자는 무의식적으로 ‘상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사촌동생은 남해 사량도에서 한 뱃사람과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된다. 경제적 궁핍과 외로움에서 벗어나며, 이제는 ‘주는 사람’으로 삶의 자리를 바꾸게 된 것이다. 그 순간부터 자매 사이의 역학은 변화한다. 더 이상 동생은 ‘나’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여동생이 가지는 노동을 대신할 사람이 없는 나는 불완전한 존재로 추락한다. 게다가 여동생은 경제적 궁핍과 외로움에서 벗어난 그 사량도로 ‘나’를 초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나'는 그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움을 위하여’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그리움’은 과거에 자신이 우위에 있었던 관계를 다시 확인하고자 하는 자기중심적 감정일지도 모른다. 즉, 사량도에 가지 않는 선택은, 이미 역전된 관계의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회피이기도 하다. 작가는 솔직히 지식인의 한계까지 솔직하게 드러낸다. 역설적으로 상전의 한계 ,사량도라는 유토피아를 그리워하지 않고 과거의 그리움에 스스로 머물게 하는 . 사량도는 어떤 유교적 상전의식이나 상하우열이 없는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의 유토피아인데도.
이 작품은 단순한 상하 관계였던 자매 간 그리움의 이야기가 아니라, 양극화의 원리를 정교하게 보여주는 서사다. 지식인 사회에 편입된 이와 미모와 음식 솜씨 까지 갖춘 이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에 휘둘릴 수 밖에 없고 가진 자의 일을 해야만 생존 할 수 밖에 없는 .가진 자는 늘 베푸는 입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의 시간과 에너지를 통해 자기 존재의 안정과 확장을 얻는다. 반면, 가지지 못한 자는 자기 삶의 시간을 타인을 위해 소비하며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래서 결국 한쪽은 피둥피둥 살찌고 반대편은 비실 비실 야위어 간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특이하게 한쪽의 변화로 인해 균열을 맞는다. 유토피아에 먼저 도착한 이가 오히려 사촌동생이기에 한편으론 환타지서사다 .
『그리움을 위하여』는 결국 과거의 질서를 애도하며 그리워하는 화자의 독백으로 끝난다.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그것은 솔직한 자기 성찰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평등한 관계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멈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나'는 상전의식을 포기한 대신 자매애를 찾았다'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땐 특별한 근거 없는 비약적이고 자기 합리화를 위한 태도로 보인다.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며 어떤 노력이 요구되는지 구체성이 없다. 작가라도 사회의식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작가도 결국 시대적 한계를 안고 변화하는 환경을 매사 주도적으로 의식을 이끌어 내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는 완벽한 존재는 아니다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렇게 대중에게 소비되고 오래된 작가로 사라지게 된다. 결국 독자도 "나'처럼 상전의식을 갖거나 우열의식을 갖거나 선택해야 한다. 그 단편작품은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움은 누구를 위한 감정인가? 그리고 그리움은 과연 함께 나란히 평등한가?”
가진 자는 자기를 위해 가지지 못한 자의 에너지를 활용한다
이 작품은 꽤 역설적이고 지식인고 가진자의 잔혹 동화 같은 느낌이다.
강한 자의 그리움은 약자의 흑역사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 관계의 수평적 단계로 진입해야 하는데도 본능적으로 버티는 것이다
문학은 분명 고립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소설은 그 효용성에서 의심받고 있다. 문학이 감상적 감성적으로만 소비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문학은 우리 시회를 바라볼 수 있는 생각의 틀을 제시하고 있는가? 독자는 문학을 통해 자신이 가진 인식의 경계를 점검받고, 때로는 그것으로 위안 혹은 확장하거나 전복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좋은 작가란 단순히 글을 능수능란하게 쓰는 사람도,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번민과 고통을 통과하며 , 삶의 모순과 불편함을 자기 안에 정직하게 품고 끌어안으며 자기만의 철학과 세계관을 세운 사람이 좋은 작가다. 그런 점에서 박완서의 단편 「그리움을 위하여」는 그래서 흥미롭다. 이 작품은 한 작가가 자기 내부의 한계를 인정하고 돌아보는 ‘문학적 반성문’처럼 읽힌다. 하지만 결국 개인의 반성문일 수 있지만 우리 시회에서 보면 두 인간관계를 통해 우리 사회의 지역, 경제적 양극화의 현상과 원리를 숨겨놓은 이야기처럼 읽힌다. ‘관계의 역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식인의 당혹감으로 읽힌다.
이 단편소설의 마지막에는 " 우리 아이들은 내년 여름엔 이모님이 시집간 섬으로 피서를 가지고 지금부터 벼르지만 난 안 가고 싶다. 나의 그리움을 위하여 그 대신 택배로 동생이 분홍빛 도미를 부쳐올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을 떠올린다. 주인은 권력을 갖지만 노동하지 않기에 세계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를 노예를 통해서만 확인한다. 반면 노예는 억압된 자리에서 현실과 직접 맞서며 스스로를 성장시킨다. 이 작품에서 '나'는 주인의 자리였고, 동생은 '노예'의 자리였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의 주체는 결국 몸으로 살아낸 동생이었다.
이는 단지 자매 간의 사적인 서사가 아니다. 박완서는 이 관계를 통해 도시-지방, 가진 자-갖지 못한 자, 지식인-노동자 사이의 위계 구조를 직조한다.
문학이 아직 의미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자기모순의 정직한 노출에 있다. 박완서는 자신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문학이 어떻게 개인의 고백에서 사회의 구조까지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단지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닌, 글을 통해 삶을 질문하는 것. 그것이 진짜 작가의 역할이자,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실천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수평적인 관계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 이 작품에서는 구체적인 노력은 상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도 모를 것이다. '그리움을 위하여'가 아니라 '부끄러움을 위하여'가 맞다.
남해 사량도는 외로움의 질곡에 빠진 이가 로또처럼 운만 좋게 사랑을 이룬 유토피아다.(자신의 자산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일어나기 힘든 , 관계를 역전시킨 비현실적인 천사 같은 사량도 선장을 만나지 못했다면, 풍랑주의보를 뚫고 이 섬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사량도의 이야기는 너무나 비현실적 이기까지 하다. 유토피아에 끼지 못한,가고 싶지도 않은 '나'의 외로움과 불완전함은 문학적으로 탁월하게 절제되어 있다.
문학적이고 품격 있는 관계처럼 포장되었을지 모르지만, 만일 사촌동생이 자신의 부지런함과 살림 솜씨, 성실한 노동으로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더 이상 닭모이 주듯 시혜를 베푸는 사촌언니의 은밀한 우월의식을 먼저 알아 차리고 그 수모스러운 관계를 스스로 끊어냈다면, 그 선택은 단절이 아니라 진정한 유토피아와 수평적 관계로 가는 과정임이 마땅할 것이다. (물론 그것도 문학이나 영화에서 남용되고 있는 도식적이고 구태의연한 설정들이다) 그래서 난 이 작품이 소설 속의 '나'처럼 굉장히 능수능란한 문학의 우월과 권위의 외피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다. '문화민주주의'라는 시선으로 토론하고 논쟁해 보기 좋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