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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된 황제 3년 만에 쿠데타로!

최초 배우 겸 황제인 후당의 이존욱

by 신지승



당나라가 대기근과 황소의 난(875-884)으로 쇠약해진 끝에 907년 황소의 2인자 주전충에 의해 멸망한다. 중원 각지의 군벌들이 중앙권력을 위해 발호하는데 이 혼란 속에서 하북의 사타족 군벌 세력을 기반으로 이존욱의 아버지 이극용은 주전충과의 대결에서 패한다. 그의 아들 이존욱은 그후 후량을 세운 아버지의 원수주전충과의 대결에서 뛰어난 전술의 우위로 승리하면서 아버지의 복수를 완성시키면서 후당을 건국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황제가 된 후에 그는 뜻밖에 역사상 전무후무한 배우가 된 황제가 된다. 이천하라는 예명을 가진 이존욱. 10여 년을 버틴 그 후당에서 겨우 10년중 3년을 버티다가 쿠테타로 죽게되는 이존욱 정종이다.

이존욱! 처음에는 이름도 낯설었고 한국의 웹 데이터에는 그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었고 (자치통감번역본을 보던가 perplexity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 또 역사적 평가도 매우 인색했다.

"이존욱은 군사적 재능과 예술적 열정을 겸비한 인물로, 오대십국 시대를 대표하는 영웅이자 비운의 황제로 평가된다. 그의 통치는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했으나, 내치의 실정과 사치, 예술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단명한 왕조의 주인공이 되었다"(perplexity)

"반면에 이존욱은 전쟁에는 능했으나 사치스럽고 노는것을 좋아하는 귀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라고도 한다.출처 https://m.cafe.daum.net/shogun/MqaT/14?listURI=%2Fshogun%2FMqaT


50년을 버틴 5대 10국 시대에 겨우 3년간 즉위한 이력밖에 없는 듣보잡 황제였지만 가만 보면 그의 이야기는 진실여하를 떠나서 3년의 무게를 뛰어넘는다. 5대 10국의 황제 주제?에 배우가 되어 정사를 도외시하고 잡극에 빠져 배우들을 정사에 개입시켜 반란을 불러일으키고 만 황제로 알려졌다지만.

배우들이야 말로 백성들의 마음을 읽어주고 대변해 주고 또 기쁘게 해주는 이들이 인재라며 그들을 자사(각주에 둔 감찰관으로 행정관과는 구별된다)에 임명하기도 했다. 당시 기득권을 가진 문신들의 입장에서는 미천한 신분인 배우들이 정치감찰로 개입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5대 10국의 혼란기는 다가올 송의 새로운 공연, 서민문화의 맹아를 잉태하고 있었다. 민중들은 전쟁과 기근을 피해 강남지역으로 이주해 이앙법과 농기구의 도입으로 농업생산량은 천천히 급증할 분위기였다. 그리고 시장의 확대로 인해 상공업의 발전도 초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방군벌과 한패가 된 불교, 도교등의 종교적 회의와 더불어 민중들은 이제 전쟁, 종교보다 경제적 풍요과 더불어 개인적인 삶의 질을 원했는지 모른다(고 그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심지어 당시 오대 10국 시대와 송 초기에는 고정된 구조물로써의 공연 공간 – 와자(瓦子) 또는 구랑(勾欄)이 등장했다.

와자(瓦子): 복합 문화 공간, 시장+오락+공연이 어우러진 송나라의 문화 지구.

구랑(勾欄): 와자 안에 있거나 독립된 공연무대/극장, 잡극·인형극 등을 공연하는 공간.

초기 형태는 5대 10국 말 남방 지역의 시장 공간에서 시작되었다고 분명히 드러난다.

맥락을 살펴보면 이존욱은 궁중예술이었던 공연을 서민문화로 대중화시켜 내었던 인물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는 당시의 서민문화 어디선가 깊은 영감을 받았을 것이고 민중의 숨은 열망과 염원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전쟁과 정치,종교보다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삶의 행복과 해방의 가능성을 알아차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 연극배우가 되어 연극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 들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가치와 의미를 승자와 패자, 크고 작은 유명과 무명을 기준으로 삼을 순 없다)

분명 당시 배우들은 민초들에게는 지금처럼 대중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위치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연극인이 문광부장관을 하고 연기자가 국회의원을 하는 것에 대해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배우들의 정치참여는 900년대 그 당시에는 매우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은 4년간 연풍현감벼슬을 받았다. 종6품 명예직이 아니라 지방수령,행정직이었다.그런데 몇년뒤 비리혐의로 파직당한다 "여염집 과부의 중매를 일삼고, 겨울에 사냥을 간다고 병력을 동원해 원성이 자자하다"는 비판으로 파직당한다. 아마 당대 관료들의 편견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탄핵의 이유가 조악하다.아마 후당에서는 배우가 행정직이 아니라 배우의 역활을 지키면서 감찰관정도로 개입하는 것 같기에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


아무튼 황제 자신이 배우가 되어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곧 정치의 탈권위화와 예술정치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임이 분명하다. 정치를 도외시하고 마냥 타락이라고 볼 만한 여지가 많이 없다.

이존욱은 실제 정치를 소홀히 하고 잡극에 빠졌다고 비판과 조롱을 받지만, 대중적 감각을 정치 공간 안으로 끌어들인 점에서 마냥 내치에 무능했다고 스쳐갈 지점이 아니라 어떤 점에선 너무나 참신하고 선구적인 장면이다.(실제 배우에게 뺨까지 맞았지만 쿨하고 (심지어 상까지 내린다 )상황을 헤아릴 줄 아는 포용력과 지적인 성격은 그의 탈권력적이고 수평적 예술철학에 대한 깊이를 확실히 대변하는 것이다. 또한 배우집단의 궁내 자유출입과 정치개입은 역사적으로 그 사례가 전무후무하며 참신하다. 그의 부인 황후 유옥랑은 노비였다가 황후로 등극했는데 반란군의 반란의 핑계가 황후의 폐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존욱은 가무와 여색에 빠졌고 또 재물에 인색하게 굴었다 .이로써 병사들의 마음이 떠났다 '라고 하는데 전체적으로도 황제가 여색에 빠지고 재물에 인색?했다(구오대사) 라는 것도 , 그 당시 황제가 가질 수 있는 성문화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여색집착도 그렇지만 반란의 주어가 백성이 아니라 '병사'란게 이상하긴 하다. 역사란 건 승자가 패자를 비리와 탐욕으로 덧칠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하다. 그의 아버지 이극용도 비파의 일화로 볼 때 예술 감성과 전사의 기질이 공존한 dna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들 이존욱은 아버지와 또 다른, 개인의 개성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예술 감성의 존재로 보인다. 이것은 역사가들이 볼 땐 방탕이나 타락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개인적 기질과 당대문화에서 배태되고 송 나라의 서민 문화로 연결된 큰 맥락으로 봐선 해석의 여지가 작지 않다. )


이는 마치 오늘날 정치인이 유튜브 채널, 대중매체를 활용해 이미지 정치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진정으로 당시의 민중들을 위한 문화복지정치 혹은 예술정치의 참신하고 혁신적인 시도,민중들의 서민 미디어문화에 대한 관심으로도 짐작되기에 충분하다.

그 시대 숨어 있던 민중의 열광을 포착하고 예술을 통해 그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려했고, 그렇기에 시대를 거스르는 행동( 시대의 또다른 현상을 반영한 것일 수도 )을 한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든다. 개인적인 만족과 쾌락, 집착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이존욱이라는 개성도 그렇고 이미 서민문화가 싹이 움트고 있었고 후당을 건국하자 마자 이 모든 것이 겨우 1-2년사이에 일어난 5대10국이라는 긴장어린 정치적 상황에서 개인의 사치와 방종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또한 고전 한시가 민간가요·전기소설의 전환기로 발아한 것도 바로 이 5대 10국으로 알려졌다.

권위가 사라지고, 왕이 배우가 되어 민중과 함께 웃고 우는 그 무대는 단명했지만, 이후 송나라의 도시 문화, 민간극, 시장 중심의 예술로 이어지며 '민중의 감정'을 담는 예술 시대로 나아가는 전환적 장면이 민중속에 존재했다고 보는 것도 나에겐 무리한 것은 아닐 것 같다.


분명 후당은 짧았지만, 당대 민중의 삶을 반영한 것일 것이다. 어차피 정치권력 또한 민중의 바다위에서 항해하는 한 갓 배일 뿐이다.

바로 그 혼란과 권위의 붕괴 덕분에 예술은 더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이후 송나라에 이르러 문학과 예술은 도시의 시장, 대중의 감정, 구술적 전통 속에서 본격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된다.

1100년 전의 바닥에서 피어난 이 짧은 장면은 어쩌면 문화사적인 혁명적 시도이자, 민초의 감성의 민주화 과정이라고도 해석되어진다면 아마 돈키호테적인 인상주의적 역사이해라고도 할 것이다.

정치는 민중을 수직적인 관계로 만들지만 노래와 춤 ,극은 수평적인 교감을 가져 줄것이라는 통찰에 그는 도달했는지 모른다고 개인적으로 생각이 미쳤다.

(송나라 전후 귀족 및 지방 호족들이 ‘집안 연극단(家伶團)’을 운용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문화 향유를 넘어서,

당시 연극이 권력과 정보전의 수단으로 까지 도달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중국의 5대 10국의 탈권력화 공간 같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고려, 조선의 민중들은 지구상 가장 폭압적이고 심성 고약한 지배계급에 의해 ‘한’이라는 독특하게 뒤틀린 감성을 통해 권력 바깥의 서사를 써 내려갔는지 모를 일이다. 송나라의 도시문화, 구술 전통, 감정 중심 예술은 이후

조선의 장터, 판소리, 고소설, 일본의 가부키, 한국의 한글 소설로 이어지는 구술-서사 예술의 토대가 된다.


조선은 그것을 한문과 한글, 서당과 장터, 양반과 서민의 문화를 혼합해 더 복합적이고 층위 높은 감정 예술로 발전시킨 셈이다.

이는 오늘날 한국 콘텐츠의 정서적 깊이, 감정의 진폭, 이야기 중심 구조의 뿌리로도 이어지며, 동아시아 구술 문화의 창조적 계승자로서 조선이 자리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귀족 중심의 한시에서 민중의 감정을 담은 이야기와 노래로의 이행은, 동아시아 전반에서 나타나는 문화의 탈권위화 흐름이었다.


민주주의는 '이야기'를 소수에서 다수로 가져오는 것이다 . 왕족의 이야기도 자신의 시선과 이야기로 주도권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이야기는 글로벌 자본에게 주도 강탈당하고 있다. 이야기의 세계에서도 주전충 같은 권력에 빌붙는 이들이 있을 수 있고, 이존욱 같은 예술정치를 하는 이도 있을 것이며, 자본의 노예처럼 상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며 , 이야기의 야망이 없는 자들은 산적처럼 폭력의 이야기를 남길 것이다.

"힘들게 버티는 것보다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꼭 사는 게 최선은 아니다 "같은 민중들에게는 고통과 지옥의 5대 10국의 역사에서 잡극공연으로 스스로 무대에 서서 궁궐 밖에서 낮은 이들을 만났던 매력적인 희대의 돈키호테 황제 이존욱. 그를 우연히 만난 영감을 받은 내 짧은 시간이 고마울 뿐이다.


우리도 여전히 지배문화, 자본의 문화, 정치의 도구로서의 문화예술에 기대지 않는 자기 땅 민초들의 새로운 문화를 위해 고민하는 건 문화민주주의과 연결되는 중요한 작업이다.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기존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역사는 ‘승자의 시선으로 재구성된 이야기’일 뿐이며, 패자의 목소리, 사라진 가능성, 구원되지 못한 과거의 조각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준욱의 사례는 단지 불분명한 과거의 한 조각이지만 예술이 권력과 접속하는 새로운 방식이었음은 확실하다.


부산국제마을영화제는 그런 새로운 일들을 해내려고 한다. 1100년 전 황제가 연극배우로 등장했던 것처럼 이제 평범한 이들이 수동적인 글로벌관객이 아니라 1100년전 문화의 황제처럼 문명을 돌파하며 나서기를 바라는지 모른다.


(이글의 주제와 관계없지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지금 대한민국을 '남한'이라 부르고, '반미'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익숙했던 구호였던 시대가 있었다. 5대 10국 시대의 ‘남한(南漢)’과 ‘북한(北漢)’, 그리고 이를 멸망시킨 ‘반미(潘美)’ 장군의 이야기는 언어의 기묘한 교차 속의 이름과 단어는 시대를 넘어 묘한 흥미를 남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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