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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혈통전략의 성공과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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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승


공민왕의 생체적 한계는 신돈의 혈통 전략을 촉발시켰다

고려 말 신돈을 '요승' 축첩과 여색에 빠진 승려'라는 이미지로 재단했다. 그러나 그 이후 공민왕에 의해 이용당한 개혁승으로의 지위를 획득해 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교과서적인 평가는 얼마나 타당하고 역사 이해에 도움이 될까? 만약 그를 개인적 타락으로만 재단한다면, 당시 고려라는 구조적 위기와 정치적 불안정은 설명되지 않는다. 신돈은 단순히 개혁에 실패하고 이용당한 개인적 성적 일탈자가 아니다.

도덕의 잣대가 지워버린 시대의 맥락

당시 조선과 고려는 현재의 이란 신정체제와 이전 팔레비왕조와 비교해 보면 맥락이 비슷하다.

팔레비 왕조 시절, 이란 여성들은 서구적 복장과 자유로운 연애, 사회 참여를 누리며 성문화에서도 개방성을 향유했지만,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히잡 착용이 의무화되고 엄격한 종교 규율과 신분 질서가 강화되면서 그 자유는 철저히 억압되었다.

신돈을 '성적 타락자'로 보는 시각은 후대 유교적 도덕 기준이 만든 왜곡이다. 고려의 성문화는 조선과 달랐다. 혼인과 성관계는 2025년 오늘날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동성애도 흔했고 원간섭기 이전에는 왕실내에서 혈통보전을 위해 근친혼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 여성은 상속권과 재가의 자유를 가졌다. 정치적 혼인도 축첩도 흔했다. 이런 시대적 성 문화의 맥락을 무시하고 신돈을 조선 유교의 시선으로 단순한 '욕망의 화신'으로 낙인찍는 것은 역사적 단견이다.

로마의 삼두정치 시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여성 편력은 고대 로마에서도 유명했다. 그는 뛰어난 카리스마와 매력, 그리고 출중한 능력과 외모, 귀족적 배경을 바탕으로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다. 실제로 로마 원로원 의원의 1/3이 카이사르에게 부인을 빼앗겼다고 한다.

이후 로마의 성문화 변화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도덕 개혁으로 급격히 전환된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19-18년경 도덕법을 제정하여 결혼을 장려하고 불륜을 처벌했으며, 심지어 군인들의 결혼까지 금지하는 등 성적 방종을 엄격히 통제했다.

조선 시대로 접어들자 여성의 지위는 약화, 억압되고 여필종부 삼종지도 칠거지악 사회진출 교육기회도 고려에 비해 악화되었다.

신돈에게 씌워진 '성적 일탈' 프레임은 조선적 유교적 도덕률이 고려사에 거꾸로 투영된 결과다.

공민왕의 생체적 한계와 후계 위기

신돈의 권력 전략을 이해하려면 공민왕의 개인적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얻지 못했고, 후궁 관계도 희박했다. 《고려사》는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지만, 학계는 심리적·생리적 요인의 결합으로 본다.

노국공주 사망(1365년) 후 공민왕은 심각한 우울과 불안정에 빠져 정사에 흥미를 잃었고, 생리적 기능 저하가 동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그가 말년에 보인 기행과 현실 도피적 행동들은 단순한 성격 변화가 아니라 깊은 정신적 트라우마의 결과로 해석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조정이 이미 왕의 생식 능력 문제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공민왕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후계자 문제에 대한 공식적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는 조정 내부적으로 왕의 후사 가능성을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치 현실은 왕권의 공백을 예고했고, 권문세족들의 권력 투쟁을 예견케 했다.

신돈의 혈통 전략: 개혁의 지속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

신돈은 이 상황에서 자신이 추진해 온 개혁을 지속할 기반을 찾아야 했다. 전민변정도감을 통한 토지 개혁과 권문세족 견제 정책은 그의 정치적 생명선이었지만, 공민왕 사후 이런 개혁들이 지속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왕통이 단절되면 권문세족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불 보듯 뻔했고,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개혁 정책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결국 신돈은 자신의 혈통을 대안으로 삼는 전략을 선택했다. 반야와의 관계를 통해 태어난 우왕을 공민왕의 후계자로 만드는 것, 이는 단순한 개인적 야망뿐 아니라 아니라 개혁의 명맥을 잇기 위한 이미 발 뺄 수도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신돈에게나 공민왕에게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개인적으론 신돈의 혈통전략은 공민왕과 합의에 도달 하였으나 공민왕의 인간적 배반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공민왕이 신돈을 하루 만에 처형하고 그다음 날 바로 어린 우왕을 신돈의 집에서 데려갔다.

공민왕에게는 새로운 정치적 딜레마가 생겼다. 신돈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는다면, 이는 사실상 신돈 가문이 왕조를 창건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공민왕으로서는 자신의 권위와 왕조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신돈을 제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신돈의 제거(1371년)는 그의 개인적 잘못이나 도덕적 타락 때문이 아니라, 혈통 정치학의 복잡한 역학 관계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가 추진했던 개혁 정책 자체는 오히려 진보적이고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지만, 그 개혁을 지속하기 위해 선택한 혈통 전략이 결국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공민왕이 서거하자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로 인정받아 왕위에 올랐고, 신돈의 개혁 정신은 일정 부분 계승되었다.

만일 공민왕이 죽지 않고 우왕이 왕위에 올랐다면 뒷배가 버티고 있다면 고려의 몰락은 좀 더 더뎠을 수 있다.

제거의 정치학: 혈통이 부른 몰락

권문세족들 역시 신돈의 혈통이 왕통을 잇는 것을 역성혁명의 명분으로 삼았다.

'우왕은 신돈의 혈통이다' 라는 찌라시가 대중의 고려이반에 결정적이었을것이다.

신돈은 왕의 공백을 대비하여 왕을 대신하려는 실제적인 반역에 실패했다.

그는 권문세족이 독점한 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개혁자였다. 그가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추진한 토지 개혁은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토지 소유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합리적인 정책이었다. 또한 그가 과거제 개혁을 통해 문벌 귀족의 특권을 견제하려 한 것도 사회적 유동성을 확대하려는 진보적 시도였다.

그러나 개혁은 실패했고, 권력의 논리가 그의 목을 베었다. 후대의 기록은 정치적 낙인을 도덕의 언어로 포장했다. '요승'이라는 단어는 그래서 편리했다. 복잡한 정치적 갈등과 구조적 모순을 개인의 도덕적 타락으로 환원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 전기 사관들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라 신돈을 간신의 전형으로 규정했다. 이들에게 신돈은 유교적 질서를 파괴한 이단자였고, 따라서 그의 정치적 성취나 개혁적 의도는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왜곡되었다. 이러한 역사 서술의 관성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 신돈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를 어렵게 만들었다.

신돈의 혈통 전략, 그 성공과 실패

공민왕의 생체적 한계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신돈으로 하여금 혈통 정치학이라는 위험한 게임에 뛰어들게 만들었고, 이는 결국 그 자신과 개혁 세력 모두의 파멸로 이어졌다.

그가 꿈꾸었던 개혁의 이상, 즉 토지의 균등한 분배와 문벌 정치의 해체, 능력에 따른 관료 선발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들이다. 신돈의 정치적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고 해서 그 의도와 의미까지 부정당할 이유는 없다.

신돈의 죽음에는 공민왕의 생체적 능력의 한계(고자)에 있었고 상상할 수 없는 신돈의 혈통 전략의 반쪽 성공에 있었다. 그로 인해 자기는 죽게되고 아들은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조선의 건국으로 우왕과 창왕은 참수당하여 무덤도 없다. 창왕은 나이 9살에 참수당한다.

신돈은 고려를 개혁 했고 실제적으로 조선의 주축세력인 신진사대부를 육성 했고 토지제도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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