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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왈츠-30년 만의 깨달음

권여선의 기억의 왈츠

by 신지승


광해군이 과거시험 문제로 “어릴 땐 새해가 반갑지만, 나이가 들면서 서글퍼지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냈다고 한다. 남은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일까?

나이가 많지 않아도 뒤돌아보는 시간이 많은 사람은 세상을 쉽게 살기 힘들다. 그래서 문학이나 역사 특히 종교는 너무 일찍 접하지 않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문학이란 결국 ‘기억의 예술’이며, 그 기억은 때로 자기 합리화이고, 때로는 고통의 치유이며, 또 어떤 경우에는 말로 표현되지 못한 시간들에 대한 늦은 응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억의 왈츠』의 화자 ‘나’는 동생 부부와 교외 숲 속 식당에 갔다가 30여 년 전 대학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 무리에는 ‘애매한 연애’를 했던 또래 남자 ‘경서’도 있었고, 기억을 되짚어보니 "세상을 다 산 듯한 꼴"로 살던, "감정적으로 완전히 폐허였고 욕망이 소진된 폐광"과도 같았던 스물네 살 ‘나’의 문제가 보인다.

경서는 중학교 때부터 썼던 10년 치의 일기장들을 ‘나’에게 보내왔다. 마치 미사일의 발사 버튼을 누르는 심정으로 보냈다는 편지. 하지만 ‘나’는 당시 그것을 폭탄처럼 느꼈다. 이 소설은 30년 전 받은 10년 치 일기장과, 30년 후의 변명(소설적 응답)으로 이제야 자기 자신을 읽게 된 사람의 솔직한 고백이다.


‘장소 → 과거의 추억 환기 → 아쉬운 감정 또는 미완의 관계 회상’을 지닌 소설은 문학사 전반에 걸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구조이다.『기억의 왈츠』는 사랑 이야기이거나 또 다르게 ‘포장’된 윤리의 문학이다. 그 속에서 ‘나’는 타인의 감정을 짓밟고도 그 이유를 모른 채 살아왔던 인간이며, 마침내 무시의 구조를 성찰하는 자로 돌아온다. 이 소설은 서사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감정과 문체에 감탄하게 만든다. 특히 나 자신에게도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내면의 숲 속 식당’을 촉발시킨다. 내 삶에 어떤 발화점을 만들 수 있는가 없는가에 나는 점수를 주는 편이다. 그렇지 않다면 소설의 '나'처럼 제 아무리 문학상 수상이나 판매량등으로 미사일을 누르더라도 무시할 수 밖에 없다.

작가의 문체, 리듬, 감정의 온도, 회피하지 않는 응시의 깊이가 담겨 있다하더라도 그 작품은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20대 역시 암울했다. 운동권들은 무리 지어 혁명사, 경제사, 전략전술론을 공부하고 하루하루 열정적으로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앞서지도 뒤서지도 못하는 이들은 본의 아니게 우울하고 절망했던 시대가 바로 1980년대였다. 뭔가 자기 삶을 뻐기거나 만족에 겨워 사는 사람들보다, 시대의 아픔과 죄의식을 가져야 할 것 같은 ‘니크로필리아’적인 분위기가 만연했다. 그런데 그걸 느끼는 이들은 지금 생각하면 또한 유약하고 선량한 이들이었다.

40대에 권여선 작가를 원주 토지문학관에서 만나 두어 번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글을 쓰기 위해 토지문학관을 찾은 작가들은 간혹 늦은 밤에 문학관과 떨어진 민가의 가게 앞까지 걸어가 어두운 조명 아래서 밤늦게 까지 소주를 마셨다. 권 작가는 보기 드문 체형을 가졌는데, 어쩌면 불면증이나 민감한 정신세계를 가졌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1980년대의 시대를 내면적으로 담아 놓은 치열함, 자신의 영혼과의 전쟁에 나서는 유쾌하고 장난기많은 투사의 이미지를 그에게서 보았다. 물론 그건 순전히 내 혼자만의 근거없는 인상이었다.

늦은 밤 원주의 시골 가게 앞에서 국경의 이정 작가, 권여선 작가 등 서너 명의 작가들과의 술자리는 시간이 갈수록 나에게 고역이 되었다. 그들은 줄기차게 자기 이야기들을 쏟아냈고, 처음엔 흥미로웠지만 점점 지쳐갔다. 내가 써내어야 할 글에 대한 강박 때문이었는지, 다시 80년대의 그 분위기로 돌아가는 듯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 그들의 연설 같기도 하고 소설 속 이야기 같기도 한 말들을 듣기만 해야 하는 고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 말 못 해 환장했나? 어찌 상대가 한마디도 못 하게 쉴 틈을 주지 않냐?”라고 짜증을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나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텐데 한마듸 끼어들 틈도 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풍부하고 주동적인 입담에 좌절했던 것일까? 다음날 사람 좋은 이정 작가는 나의 삐침에 매우 미안하다고 했고, 그 뒤 간혹 연락을 주고받으며 인제 마을극장 DMZ에서 그가 만든 최초의 남북 합작 애니메이션 영화를 상영하며 인연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기억의 왈츠'의 화자처럼 나 역시 그때 감정은 바닥난 폐허였고, 폐광에서 나만의 금맥을 찾아 헤매는 외로운 광부였다. 사실 내가 만난 문학 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러했다. 상대의 기분이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참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그러한 마인드를 항상 갖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누구에게나 미사일을 발사하는 심정으로 전한 진심이 있었을 것이며, 그 진심을 한낱 폭탄 취급당한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폭탄이 되었을 것이다. 두고두고 미안함과 변명을 해도, 죽기 전까지 나는 그들의 미사실을 쏘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미안함도 다 전하지 못하고 지구상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이런 소설은 결국 공개적인 포살이다. 승려들이 매월 15일과 30일에 모여 계경(戒經)을 설하고 들으며, 보름 동안 지은 죄가 있으면 참회하여 선을 기르고 악을 없애는 수행법(修行法))을 행하는 것처럼, 글쓰기는 속을 태우던 말들을 늦게라도 퉁쳐서 할 수 있게 만드는 매우 매력적인 일이다. 소설은 그 최고봉이다. 소설가들은 사실 폐광이 아니라 일상 곳곳에서 금광을 캐는 광부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폐허에서 폐광에서 움츠리고 살면서 아픈 기억들을 끄집어내기 힘든 처지인데 그들은 먼저 깊게 고통받고 가장 먼저 금광을 캐는 광부가 된다.

난 이 소설이 자전적인 소설이라면 이게 변명인지 자기 합리화인지 아니면 30년 만의 응답인지 아니면 30년 만의 깨달음인지 그냥 단순히 '나'의 사회적 정신적 성장으로 인한 기억의 재구성인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나의 지난 시대에 대해 폐허와 폐광의 처참함을 드러 낼 능력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대부분은 일상을 견디고, 실수하거나 상처받아도 혼자 반성하거나 조용히 회개한다. 그것이 타인에게 노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는 내면의 방 안에서 조용히 자책하고, 누군가를 떠올리고, 혹은 묻어버린다. 그래서 반성은 종종 폐쇄적인 자기 구조 안에서만 머무른다.

하지만 소설가는 다르다. 그들은 사적인 반성을 서사로 바꾸고, 공적인 문학으로 만든다. 그들은 자기 고통을 언어로 캐내는 동시에,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려 한다. 자기혐오와 죄의식, 실패와 치욕을 인물의 이름으로, 플롯의 맥락으로, 문장의 호흡으로 바꿔낸다. 말하자면 그들은 공개된 참회의 직업인이다. 노출문화의 주체들과는 또 다른 이들이 폐허속에서 조용히 침묵할 때, 그들은 글로 말하는 '책임''과 '자유'와 '재미'를 택한다.

우리 모두는 (많은 이들은) 말하고 싶어 한다. 어두운 원주 흥업면 매지회촌길가의 허름한 가게의 전봇대 조명 아래 소주잔을 기울이며 적당히 말하고 듣고 웃으며 언어의 왈츠를 추고 싶어 한다. 난 그 욕망의 하나로 돌탑영화에 집착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간혹 나도 이제 온전히 내 이야기만 줄기창창하고 싶어진다. 기억의 왈츠의 남자 경서처럼 미사일을 쏘는 심정으로 말이다.말이 아니라 글은 그것을 유일하게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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