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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병원과 아우슈비츠는 하나다

손홍규의 예언자,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by 신지승

누구나 오늘을 살지만 과거로 갔다 미래로 갔다 한다.

그때 그랬다면? 내가 영화제 행사를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홀로 마당 청소를 하다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척추골절사고가 없었을까 또 수술이 잘되었다면 허리협착증으로 인한 고통이 없었을까?


손홍규의 소설 '예언자'

'앞을 볼 줄 아는 노인의 기이한 능력은 자식들을 비롯해 노부인까지 혼란스럽게 했지만 누구보다 노인 자신이 혼란스러웠다. 노인은 잠을 자다가 보았고 눈을 뜬 채로도 보았다. 옛사람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나 말을 건넸고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풍경이 떠올랐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와 고함 혹은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눈이 부실 만큼 환한 빛이 노인 앞으로 왈칵 다가오다가 깜깜하게 물러나기도 했다. 그 많은 장면 중에 정작 노인이 간절히 알고 싶던 것들은 별로 없었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 몰라도 괜찮은 것들이 더 많았다.'


노인은 눈앞에 떠오른 겨울밤 정환의 베트남인 아내가 도망갔던 그날밤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몸을 비틀었다 노인은 벌떡 일어나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그 혼인 정말 할 텐가 하지만 때리지는 말게 그날 술도 마시지 말게 자네가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는 동안 자네 안사람은 눈 속을 헤치고 먼 길을 떠나가게 된다네 알겠는가 내 말 명심 하게나 그리 할 수 있겠는가?" 손홍규의 소설 '예언자'중에서 .


소설 '예언자'는 시간적인 위치를 분간하지 못하고 과거의 일을 예언하는 노인이 나온다 그러니깐 과거의 어느 시점에 있는 것처럼 무슨 일이 생길 거니깐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마! 그런데 그 아들은 군대에서 사고로 죽었다 그러니깐 노인은 사촌 당숙의 아들이 아직 군대에 가지 않았던 시간에 서 있다

손홍규는 과거에의 성찰이나 후회가 아니라 '예언자'로 둔갑시키는 바람에 문학적인 묘미와 매력은 얻었을지 몰라도 , 그 형식을 통해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해 내는지 몰라도 그게 도대체 어쨌다는 것인가? 간혹 소설이라는 부질없는 관념과 회상에만 머무르는 행위에 앞으로 올 미래에 대해 희망적인 대안에 간절하게 목마른 이들은 차라리 무당을 찾거나 정치인을 찾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물론 과거에 미래를 여는 비밀의 열쇠가 있다는 메시지는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진리이기는 하다.


예언이란 개인의 자유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개인에게 방향보다는 공포를 가하는 측면이 강했다.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운명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떤 예언도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매뉴얼을 주지는 않는다. 사실 인간의 모든 업은 그 사회구조에 있거나 유전자에 있거나 지구적인 불가항력적인 자연이다.

'예언이란 결국 과거를 포함해 삶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을 때 가능한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모든 예언이란 예언이기보단 당부 같은 것이다. '단디 해라'는 당부를 집단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상 나치즘의 공포정치 같은 것이다.


아버지는 지금 노인요양병원에 계신다.

"뇌가 노화로 인해 줄어들고 있어요" 대학병원의 CT를 찍고 난 뒤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대학병원에서 더 이상 심장이 나빠 허리협착수술이나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나왔다. 통증을 호소하는 노인을 15일 동안 입원시켜 놓고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게 이젠 없단다. 담당의사는 심지어 이렇게 고통을 호소하지만 그런 통증이 동반될 수 없다. 좀 과하게 통증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했다. "엄살이라고요?" 집으로 모시기에는 케어가 안되기에 요양병원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데도 통증을 호소하니 옆에 있는 사람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양병원으로 옮긴 첫날부터 1500만 원이 들어 있는 통장이 없어졌다고 고함을 지르며 소란을 피운다. 이제까지 말 한마디 없었던 통장의 등장에 처음엔 혼란스러웠다. 다른 통장은 가지고 있다 아무리 말해도 그것은 아니란다. 그 통장에 왜 하필 1500만 원이 있는가라고 묻지만 횡설수설한다. 빨리 경찰에 연락해서 수사를 해야 한다고 나를 다그친다. 결국 의사는 나의 동의하에 진정제를 주사하였다. 모두들 그것이 뇌축소에 따른 치매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작년 말까지는 아버지는 요양병원을 인생의 마지막 종착지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고 방에서 청소를 하다가 못 본 통장 하나를 발견했다.

1500만 원이 들어 있는 통장이었다. 노인연금을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찾지 않고 고스란히 모셔놓은 통장이었다. 이통장이었구나!

결국 치매가 아니었단 말이다. 아버지의 정신은 멀쩡 했건만 나와 의사들은 그 통장을 보지 못하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 또한 너무 급하고 과격하게 경찰을 요청하였던 것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소란을 떨었던 것도 의사와 나의 판단에 분명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요양병원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너희들이 훔쳤지?"라는 이전에 없었던 비상식적인 사람에 대한 공격은 모두를 당혹하게 했고 의심할 수밖에 없게 했다.

아버지는 아직도 정신이 맑다. 8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판단이 너무 날카롭고 분명해서 탈이다. 오히려 사람들의 말문을 닫게 할 정도로 작은 부분에서 집요하다. 물론 말로 상대를 이겨 들려고 하는 성격에 질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몇 달의 시간이 지나고 협착증으로 인한 고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뒤 여유 있는 충분한 시간의 의사와의 토론이 큰 병원이면 그 시스템상으론 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민하다가 고등학교 친구 중 정형외과하는 친구를 찾았다. 처음 본 고등학교 의사 친구는 큰 병원의사들보다 나와의 대화시간이 길었고 언제나 수시로 나의 질문에 성실히 답해주었다.

이전 큰 병원의사가 믿은 것은 기계였고, 진단이었고, 통계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의사친구는 단순 통계가 아니라 스님처럼 인간적인 예언이었다. "고령이지만 수술은 권하지 않아. 심장이 안 좋더라도 일단 기다려 봐"

손홍규의 예언자는 사랑하는 관계에서의 당부다. 나의 의사친구는 예언가가 아니었고 이전의 대학병원 의사들은 기계에 의존하는 예언가였다.


나는 종종 요양병원을 오고 갈 때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아우슈비츠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임레 케르테스작가를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알았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헝가리 작가다 (물론 논란이 많다) 《운명》이라는 소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회고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죽음이 코 앞으로 다가오는 그곳에서 “이 아름다운 강제수용소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동경이었다.”라고 말한다.

강제수용소에 대한 듣도 보도 못한 불온한 상상이었다.

요양병원 또한 다르지 않다. 물론 그곳은 감금이 아니라고 한다. ‘보호’라는 이름의 통제가 이루어지는 공간. 물리적 강제는 없지만, 삶의 방식은 통제된다. 식사, 기상, 배변, 약 복용, 모두가 스케줄이고, 그 속에서 개인의 시간은 단순해지고 사라진다.

"수용소에 도착하자 냄새가 났다. 줄을 섰다. 옷을 벗었다. 머리를 밀었다. 규칙은 명확했다. 따르기로 했다.”

임레 케르테스는 위와 같이 표현했다.

손홍규의 '예언자'와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은 그 문학적 표현과 사실적인 문학의 차이가 대비된다.

어쩌면 기술적 구성과 기교 그리고 기록적 문체의 차이일 수도 있다.


케르테스는 아우슈비츠를 "근대 문명의 최종 형태"로 본다. 전체주의란 어떤 정치체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상태라고 본단다.

슬퍼하거나, 저항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그냥 익숙해져야 한다는 문명과 운명에 대한 두 소설이다.

어차피 인생이란 누군가나 사회로부터 온전히 케어받지 못하는 시간일 것이다. 어떤 요양병원도 개개인 노인의 삶을 온전히 요양하지 못한다.

비약이지만 어쩌면 아우슈비츠처럼 죽음의 가스실로 가는 절차일 뿐이다. 그래서 더욱 더 숨 쉬는 것, 작은 행복 같은 것,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절박하고 귀하게 '예언'될 수 있어야 한다.


치매를 소재로 한 영화 소개

《더 파더 The Father》 (2020, 플로리안 젤러) 줄거리: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그의 딸이 겪는 현실의 붕괴 특징: 노인의 인지적 혼란을 관객의 시점으로 체험하게 하는 연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앤서니 홉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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