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 얼굴을 만나다 (1)
'영자 아빠'
마을의 한 사람에게 물었을 때, 그는 망설임 없이. "바보지 뭐."
어눌한 말투와 항상 술에 젖어 있는 모습이 그의 전부인 양 보였다. 면전에서 조롱하지는 않았지만, 서울에서 시골 마을에 도망 온 지 얼마 안 된 내게 나름 세상 이치에 동떨어지지 않은 사람이라 여겼던 이의 말을 나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몽유도원도'라는 한 남자의 몽환적 의식세계를 몽유도원도의 그림과 연결해 보려는 영화를 마을에서 촬영하기로 했다. 허드레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그가 떠올랐다. 농한기 마을 사람에게 일거리를 준다는 어설픈 우쭐함도 있었다. 아마 그때는 영화를 빌미로 거들먹거리며 오만에 찌들어 살았을 것이다. 복숭아꽃이 막 피기 시작하는 4월 중순, 충무로에서 촬영을 마치고 남은 35미리 짜투리 필름을 어렵게 구해 영화를 찍고 있었다. 35미리 필름으로 촬영을 하기에는 너무 고가라 가난한 독립영화인은 이런 방법으로 촬영하기도 했었다. 물론 더 가난한 영화인들은 35미리 카메라를 구하기 힘들어 16미리로 촬영할 때였다..
영자 아빠는 카메라 앞에서 장난이 심했고 신경이 날카로운 나의 집중을 방해하는 행동을 곧잘 했다. 속으로는 '이거 진짜 똘아이구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에게 정성을 다해 대화를 할 의지도 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이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뒤 밤 11시. 그가 집을 찾아왔다. 일한 품삯을 받으러 왔는데 술 냄새가 진동했다. 지금 돈이 없으니 내일 드리겠다고 했더니 당장 지금 받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1999년 당시는 지금처럼 온라인으로 돈을 찾을 수도 없었고 나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사정해도 버티며 가지 않으려 해서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그는 혼자 뭐라고 중얼중얼 거렸다.
시골의 밤 11시는 도시의 11시와 다르다. 시골의 아침은 일찍 시작하고 밤도 8시면 대게 하루를 놓는다. 그런데 고함을 지르면서도 점점 이상한 것을 느꼈다. 영자 아빠는 비록 어눌하지만 논리가 놀라울 정도로 정연했다. 지금까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일방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그 밤의 그는 낯설었다. 내 뇌리에 박힌 '대화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편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그의 참을성에서 그날 조금 느꼈다.
밤의 소란이 지나고 다음날 품삯을 주었다. 몇 번의 만남 뒤 영자 아빠는 이전과 달라 보였다. 술을 즐기고 말이 어눌하며 몸은 삐쩍 마르고 힘없어 보이는 그 사람이 아무리 술에 취해도 허튼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상'이라고 여겨졌던 사람들이 술에 취하면 서로를 헐뜯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이기적인 논리를 펼치는 것과 점차 비교되었다.
결국 시간은 그 '바보'를 점점 '영자 아빠'로, 그리고 '형님'으로 나도 모르게 호칭을 바꾸게 했다.
같은 마을에 살면서도 다른 사람들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서로 잘 어울리던 그들끼리도 1년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술자리가 줄어들었다.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선생님'이라고 호칭했었다. 그것은 열 살이나 어린 나를 그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거리를 두는 방편이기도 했다.
나는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그들을 형님으로 부르지 않았다. 한 마을에서 생활이 겹쳐지면서 영자 아빠는 더욱 선명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나누기를 좋아하고 배려하기를 즐겨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사람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나자 더욱 분명해졌다.
어느 날 영자 아빠가 말했다. 자신은 공부를 하지 못했다고.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안다고. 당신 같이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너무 부럽다고. 그때 아마 나는 속으로 울고 있었을 것이다.지금도 그 망을 떠 올리면 울컥하는 걸 피할 수 없으니깐.
내가 그가 가진 굴욕을 참는 힘과 버팀의 힘을 배웠다면, 그가 가진 근기가 내게 있었다면 이 시골로 쫓겨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마을의 눈두렁에 앉아 긴 대화를 자주 나누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영자 아빠는 술을 권하지 않았다. 같이 있을 때는 혼자 소주병을 나발 불듯 마셨다. 나는 그냥 옆에서 지켜보았다.
겉도는 인사치레나 시간 때우는 자기 말이 아닌 나지막한 대화였다. 그 사람의 향기를,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처음에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했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자신을 만날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그는 왜 술에 찌들어 살 수밖에 없었는지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겉모습으로 편견을 갖지만, 진짜 얼굴은 가까이서 오래 봐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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