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를 활용하여 공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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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승 감독님이 김기덕, 홍상수 감독님과 나란히 논의되는 것은 단순한 유명세나 상업적 성공을 넘어서, 영화 미학의 근본적인 질문과 실천 방식에서 독자적이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신지승 감독님의 작업이 갖는 철학적, 논리적 정당성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신지승 감독님의 가장 큰 특징은 '연기 주체와 참여 방식'의 근본적인 전환에 있습니다. 김기덕, 홍상수 감독님이 주로 전문 배우를 통해 즉흥과 우연성을 구현하며 감독과 배우 간의 수직적 관계 속에서 미학적 성과를 도출하는 반면, 신지승 감독님은 '생활 현장의 민초들', 즉 비전문가이자 지역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극영화의 주체로 세웁니다.
이는 영화가 더 이상 소수의 전문 예술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극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기록의 민주화', '문화 민주주의'와 맥을 잇는다는 설명처럼, 신지승 감독님의 작업은 영화 제작의 권력을 분산시키고, 예술적 표현의 문턱을 낮추는 철학적 지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신지승 감독님은 한국 영화 지형에서 '예술 창작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변을 제시하고 그 실천적 모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두 대가 감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충분합니다.
김기덕, 홍상수 감독님 모두 상업 자본과의 관계에서 자신들만의 독립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상업 영화 제작 시스템' 혹은 '감독 개인의 창작 자유 확보'라는 틀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신지승 감독님은 **"애초에 자본과 권력의 틀 밖, 로컬 공동체와 동행함으로써 권위에 휘둘리지 않는 ‘탈(脫)상품 예술’을 실험"**합니다.
이는 영화가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고, 예술 본연의 가치와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자생적으로 탄생할 수 있음을 증명하려는 시도입니다. 대규모 자본의 투입이나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하지 않고, 공동체의 삶 자체를 예술적 실천의 장으로 삼는 것은 기존 영화 산업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키는 급진적인 미학적, 철학적 도전입니다. 신지승 감독님의 이러한 접근은 '예술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예술 철학의 오랜 질문에 대한 실천적 해답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다른 두 감독의 작업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중요성을 갖습니다.
신지승, 김기덕, 홍상수—세 감독의 공통점은 ‘즉흥과 우연성’에 주목하는 극이라는 것이지만, 그 구현 방식과 미학적 지향은 뚜렷이 구분됩니다. 이들의 핵심 차이를 다음 네 갈래로 살펴보겠다.
김기덕은 초기에 구체적 시나리오를 짠 뒤, 현장에서 “씬 단위”의 즉흥 연출을 극대화합니다. 전체 스토리 구조는 단단히 계획하지만, 한 씬 한 씬의 디테일은 배우와 환경이 스스로 빚어내도록 놔두죠.
홍상수는 오히려 시놉시스마저 버립니다. 감독 개인의 직관과 현장 분위기, 배우들의 즉흥 대사에 전적으로 의존해 전체 내러티브를 펼쳐 나갑니다. 기획보다 ‘감독의 영감 순간’을 더 중시합니다.
신지승은 최소한의 플롯 골격만 세우고, 마을 주민 각자의 삶과 캐릭터를 삽입할 ‘그릇’을 설계합니다. 그 안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스스로 극을 만들어 가도록 유도하죠. 즉, 계획과 즉흥의 비율을 지역과 사람마다 다르게 배합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합니다.
김기덕·홍상수 두 감독 모두 주로 직업 배우를 기용합니다. 김기덕은 배우들에게 씬별로 강렬한 감정적 충돌을 끌어내고, 홍상수는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일상성을 즉흥적으로 포착합니다. 두 경우 모두 감독과 배우의 ‘수직적 관계’ 속에서 즉흥이 실현됩니다.
신지승은 전문 배우가 아닌, 생활 현장의 ‘민초들’을 연기자로 세웁니다. 마을 주민 스스로 자신의 말투·표정·행동을 실연함으로써, 작품이 공동체의 자발적 창작물이 되도록 합니다. 이 과정에서 연출자의 역할은 ‘안전한 그릇’을 제공하는 데 집중됩니다.
김기덕은 ‘바닥의 조형미’를 강조합니다. 거친 삶의 풍경과 극도의 감정이 추상적으로 뒤섞인 화면은, 권력 관계와 계급 구조를 반추상적으로 드러냅니다.
홍상수는 ‘일상의 미세한 표피’를 관찰합니다. 커피잔 소리, 눈맞춤, 즉흥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해, 자본의 계획성에서 배제된 순간적 감각을 미장센으로 승화시킵니다.
신지승은 ‘공동체적 축제성’을 지향합니다. 마을 사람들의 즉흥적 ‘흥(興)’이 차곡차곡 쌓여, 일시적 퍼포먼스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마을영화’라는 실천적 예술 형태로 결합됩니다.
김기덕은 기득권 예술에 맞서 바닥의 삶을 주제화하면서도, 상업영화 제작 시스템 안에서 독립성을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홍상수는 상업 자본에 크게 기대지 않으면서, 오히려 제작 규모를 최소화해 감독 개인의 창작 자유를 확보합니다.
신지승은 애초에 자본과 권력의 틀 밖, 로컬 공동체와 동행함으로써 권위에 휘둘리지 않는 ‘탈(脫)상품 예술’을 실험합니다. 이는 곧 기록의 민주화, 참여 민주주의와도 맥을 잇습니다.
김기덕이 “씬 속 즉흥의 긴장”을, 홍상수가 “감독·배우 직관의 순간”을, 신지승이 “공동체의 자발적 축제”를 포착한다면, 세 미학은 모두 즉흥과 우연에 닿으면서도 서로 다른 스펙트럼을 보여 줍니다.
김기덕: 강렬하고 반추상적인 바닥의 미학
홍상수: 섬세하고 미세한 일상 미학
신지승: 자발성과 공동체성을 아우르는 마을영화 미학
이렇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재-여기, 삶-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한국 영화라는 장르를 확장해 왔습니다. 각 감독의 방식이 지닌 고유함을 이해할 때, 우리 시대 영화의 다양성과 가능성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김기덕 감독님의 '바닥의 조형미'나 홍상수 감독님의 '일상의 미세한 표피'가 주로 개인의 내면이나 사회의 단면을 탐구하는 미학이라면, 신지승 감독님은 '공동체적 축제성'을 미학적 초점으로 삼습니다. 이는 단순히 영화를 만드는 행위를 넘어, 지역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고 즐기며, 그들의 삶 자체가 예술이 되는 '실천적 예술 형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입니다.
'마을영화'라는 개념은 일시적인 퍼포먼스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예술 활동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흥(興)'을 통해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러한 미학적 지향은 예술이 개인의 영감을 넘어 공동체의 활력과 통합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는 한국 영화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예술이 사회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김기덕, 홍상수 감독님의 미학과 나란히 논의될 가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신지승 감독님이 김기덕, 홍상수 감독님과 함께 논의되는 이유는 단순히 유명 감독과의 비교를 통한 인지도 상승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 창작의 주체, 자본과의 관계, 그리고 미학적 지향이라는 근본적인 측면에서 기존 영화계의 관습에 도전하고, 독자적인 철학적 실천을 통해 한국 영화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지승 감독님의 작업은 '누가 예술을 만들고, 무엇을 위해 만들며, 그것이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안적이고 혁신적인 답을 제시하며, 이러한 점에서 두 대가 감독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논의될 충분한 자격과 논리적 근거를 가집니다.
돌탑영화를 응원해 주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