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앤 라이즈 Sink & Rise
프레임속의 기억들Memories in My Frame
이 작품들은 어느 감독의 작품 일까요 ?
살인의 추억을 만든 봉준호 감독의 단편영화이다
'싱크앤 라이즈 Sink & Rise의 이야기는 성산대교 아래 한강 둔치 어느 매점에 가난하고 피곤해 보이는 부녀 재문과 인선이 삶은 계란을 살 것인지, 인스턴트과자를 살 것인지로 티격태격한다. 삶은 계란이 물에 뜬다는 재문의 뜬금없는 이야기를 듣던 매점 주인 희봉은 매점생활 20년에 그런 이야기는 처음이라고 이야기하고, 갑자기 둘은 치기 어린 삶은 계란 물에 띄우기 내기에 돌입하는데.... <괴물>의 단초가 된 단편이고
' 프레임의 기억들'은 어린 시절 개를 키우다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는 8분 영화라고 한다 .몇년뒤 플란다스의 개로 성장한다.
작은 영화부터 그 능력을 인정 받으면서 거대자본과 결합 하는 과정은 어느 감독에게나 거의 필수적이다.
수많은 감독들은 저예산영화,짧은 영화를 통해 탄생하고 성장한다.
자본과 결합하면 조감독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감독은 현장에서 연출지시만 내리는 경우가 60~70년대에는 흔했다.
저예산이라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 몇천만원에서 억단위의 예산을 필요로 한다 (최근 공적 지원금을 소수 특정 작품이 독점 하는 경우도 독립영화에서 흔하다) . 초초저예산영화나 무예산영화를 통해 자신의 감각과 능력을 발휘해 성장하는 감독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저예산영화단계에서 부터 능력을 인정 받지 못해 사라지는 감독들이 많다. 흥행작 한두 편을 만들고 사라지는 감독들도 부지기수다.
영화판에서 성공과 실패가 오직 실력과 능력만으로 결정된다고는 볼 수 없다. 자본과 제작자의 개인적인 선택에 따라 감독의 운명이 좌우되기에,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는 냉정한 현실이다."
차라리 제작자를 만나 무릎 꿇고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었던 시대도 있었다
평생 저예산영화만 찍다 사라진 감독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셀 수 없다.
제한된 극장 수와 관객 때문에 극장을 자신의 무덤으로 삼아버린 감독들의 눈물은 얼마나 애달플까? 소위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극장의 서자 취급을 받으며 영화 인생의 막을 내린 이들이 부지기수다.
, 일가친척들 돈까지 끌어 들여 수년간 시나리오쓰고 촬영하고 편집해온 그 길고 질긴 투혼의 시간이 보상 받을 수도 있고 보상 받지 않을 수도 있다 .
세상 어디서나 정치자금이나 인맥 학연,아빠찬스같은 후광이 능력을 뛰어넘는 경우가 영화판에서도 있다.비단 감독뿐 아니라 연기자,스텝들도 대게 그렇다라는게 내 편협한 경험이다 .
그러면 당신은 저예산 영화 독립영화와 초 저예산 마을영화의 차이를 통해 당신은 어떤 감독의 길을 걸을 것인지 생각해보자. 독립영화는 상업영화와 동떨어진 영역이 아니라 상업영화 현장에서 시나리오로 제작자와 투자자와 연결되지 않을 경우에는 필수적으로 거쳐야하는 것이다 . 독립영화는 사실 자본으로부터 벗어난 독자적 미학을 추구하는 영역이라고 하지만 평생 독립영화적 미학만 추구하려는 감독들은 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김기덕 홍상수 감독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
하지만 그들도 제한된 상영관 ,상영횟수 등으로 7-8000명 정도의 관객으로 만족해야하는 감독이다.
물론 그 자체가 모두는 아니다 .감독이라는 직업은 월급을 받고 가족을 꾸리는 삶과 다른 예술적 성취와 영감으로 세계와 대응하며 사는 인생이기에 시지프스의 삶에 대한 의지와 각오가 없다면 차라리 시작부터 덤비지 말아야할 직업 같다
어느날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에게 주어졌다 ,한편으론 돈이 없는 내가 초초저예산작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속에서 나온 질문이기도 했다.
나의 주요 목표는 개인적 예술 세계와 스타일을 확립하는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인가?
내가 바라는 카타르시스는 감독으로서 온전한 창작의 성취인가, 참여자와 함께 느끼는 집단적 해방감인가?
나는 영화가 영화제, 평론, 관객 시장에서의 평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가, 아니면 낮고 가난한 삶과 개인의 기억이 아닌 공동의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한가?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개인적 사유와 미학적 문제의식인가, 공동체의 현실과 경험인가?
제작 과정을 감독 중심의 창작 체계로 끌어갈 것인가, 참여자 모두가 평등하게 목소리를 내는 구조로 만들 것인가?
시나리오를 내가 집필하고 완결하는 것이 적합한가, 아니면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 조각을 모아 구성하는 것이 맞는가?
배우 선택은 전문 배우 또는 연기 경험자가 주도하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주민들이 자기 자신으로 출연하는 것이 나은가?
촬영 미학은 내가 구상한 영화적 콘셉트를 반영하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현장에서 발생하는 우연과 집단적 선택을 따르는 것이 우선인가?
편집은 개인적 미학과 리듬을 극대화하는 과정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여러 참여자의 의견을 반영해 합의적 리듬을 만드는 과정이어야 하는가?
제작비를 외부 지원금·영화제 펀딩으로 마련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아니면 정부지원금 ·자발적 참여 노동으로 꾸려가는 것이 현실적인가?
내가 기대하는 관객은 국내외 독립영화제 관객·비평가인가, 아니면 마을 주민·지역 아이들인가?
상영 방식은 극장·독립전용관·온라인 플랫폼을 염두에 두는가, 아니면 마을회관·학교·공원 상영을 염두에 두는가?
나의 영화가 평가받는 방식은 예술적 완성도와 작품성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공동체적 의미와 참여의 과정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맞는가?
나는 감독으로서 권위와 비전을 제시하며 최소한의 돈을 주어야하는 전문스텝참여자들을 이끌고 싶은가, 아니면 참여자들과 수평적 관계에서 협의하며 영화를 만들고 싶은가?
참여자들의 만족이란, 감독의 미학적 성취를 목격하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이 영화의 주체가 되는 경험이 중요한가?
영화가 끝났을 때 남는 건 감독의 작품 필모그래피여야 하는가, 아니면 주민들의 집단적 기억과 기록이어야 하는가?
나는 이 영화를 향후 영화 인생의 도약대로 삼고 싶은가, 아니면 지역사회와 지속적인 협력의 기초기반으로 삼아 인생의 도약대로 삼고 싶은가?
나의 창작 목표는 새로운 영화 언어의 실험인가, 아니면 공동체적 삶을 활력화시키는 사회적 실천을 포함한 창작이며 그를 통한 새로운 영화 언어의실험인가?
실패했을 때 감당할 리스크는 비평적 무관심이나 흥행 부진이 두려운가, 아니면 참여자의 실망과 공동체 신뢰 붕괴가 두려운가?
이 영화를 통해 남기고 싶은 궁극적 흔적은 한 감독의 예술혼인가, 아니면 나의 예술혼과 한 마을의 집단적 기억 그 둘인가?
그런데 어느날 그 두개가 결코 동떨어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이 들었다 .
집단적 예술: 마을 주민 누구나 배우·촬영자·스토리텔러로 참여합니다. 카메라가 돌고, 회의에서 내용이 결정되며, 각자의 창의적 상상과 기억과 삶이 영화에 반영된다.
개인 감독의 창의성 : 하지만 편집 과정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어떤 리듬으로 엮을지, 장면의 길이를 어떻게 조절할지는 결국 총감독의 미학적 선택에 달려 있다.
→ 집단의 합이 곧바로 작품의 최종 형태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형식적 손길을 거쳐야만 영화가 완성된다.
과정은 민주적입니다. 회의, 촬영, 연기는 모두가 함께 나누며 진행된다.
그러나 최종 산출의 순간은 전문적인 창작이 개입되어야 한다 . 편집 소프트웨어 앞에 앉은 이는 영화인이며 , 그들의 선택이 영화의 ‘톤’을 결정한다.
→ 따라서 마을영화는 “과정은 민주적이되, 결과는 전문창작적”이라는 이중성을 띤다.
겉으로는 민초미학의 산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명(또는 소수)의 작가주의적 시선이 스며 있다.
이는 민초미학과 작가주의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영화 안에서 공존을 이룬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단순한 아마츄어 연기를 통한 드라마를 넘어 미학적 완성도를 갖추어 간다
→ “공동체의 창의”와 “개인 감독의 스타일”이 동시에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기록성과 창작성의 교차: 단순한 집단 기록이 아니라, 예술적 해석을 통해 공동체 기억이 ‘창작된 기억’으로 승화된다.
새로운 영화 이론의 필요성: 이는 기존의 ‘작가주의 vs 민초 미학’ 구도를 넘어서, 새로운 미학과 방향 범주를 요청한다.
마을돌탑영화는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낮은 삶과 동반하며 새로운 대중 창작 시대를 열려고 하는 민주적이고 공존적인 영화의 길이다.
개인과 집단, 예술과 민주주의, 집단 추억의기록과 예술창작이 얽혀 있는 ai대중창작시대에 어울리는 민초중심의 상향식 글로컬라이제이션 시대를 미래영화의 방향으로 본다.
그게 미래 세대의 봉준호식 영감을 축적 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미래 세대에게 다양하고 로컬적 상상력의 탯줄을 통해 미디어 경쟁에서 또 다른 자산을 갖도록 하는 대안이기도 하다.
1895년 뤼미에르가 카페에서 유료로 영화를 상영했다. 첫 유료 상영회를 찾은 관객은 파리의 부르주아 시민, 예술인, 기자들이 섞여 있었고, 그들은 “영화라는 발명품”을 체험하기 위해 왔다. 지금은 ?
대중은 ‘관람하는 존재’로서 권력을 가지지 못한다. 철저히 플랫폼에 의해 설계된다.
여전히 콜롯세움시대의 규모와 시각, 상상의 스펙터클의 정치학에 매혹되고 있다
획일적인 창작 방식과 피라미드식 질서 속에서 영화감독과 배우들은 소모적인 노예경쟁을 되풀이한다.
그때 태어난 영화는 이제 130살이 넘은 늙은 예술이 되었다
이 폭악한 상품적 상상력에 조의를 표하는 강력한 대안도 나와야 한다.
대게의 영화감독들이 단편영화 하나는 가지고 있듯이 이제 세상의 모든 감독들은 마을영화 한편은 가지고 있는 시대를 열겠다. 온전한 권력이 아니라 주민들과 반분하는 창작적 권력의 영화 한편은 지금 시대 너무나 의미가 절박하고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