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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미래를 위한 취미생활

by 신지승

"왜 자기 마을사람들만 보고 말 것을 힘들게 만드는가? 그건 그냥 당신과 그들만의 취미생활을 하자는 건가?"라고 공개적으로 지적하면서 예비사회적 기업 심사에서 탈락당했던 경험이 있었다.

이후에 나는 어렵게 그 심사위원을 찾아 메일로 항의했다. "당신은 산업과 예술로서의 영화를 얼마나 알고 경험했는가? 그 병폐와 그림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당신은 영화에 참여하여 제작한 경험이 있는가? 아마추어성과 동아리 수준을 넘어선 극소수의 전문가와의 동반 협업작업이며, 미디어 기술을 개인적으로 배우는 미디어교육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어떤 교육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들은 엄연한 창작자로 참여하고 있다.

한 마을의 지역적 집단 지성을 모으고 농경 사회에서 가졌던 마을 단위의 공동 참여작업으로 현대 상품 문화가 놓친 새로운 공동체문화의 기억을 축적하는 과정이다.

전문가가 그 산업과 예술로서의 영화만 존재하고, 그 저변 대중들의 인문학적 문화에 대한 관심 없이 오직 소비관객으로만 묶어버리면 어떻겠는가? 기존 영화산업은 관객을 개별적이고 고립된 수용자로 만들어낸다.

아무리 도서관이 많아도 시험공부하는 이들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아무리 문화이벤트나 인문강좌가 많아도 발 빠른 소수의 사람들만 혜택을 보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영화의 위기? 그건 산업과 예술로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남의 집 아궁이 불구경 같은 심정이다. 어차피 시즌용 영화처럼 3년~10년 뒤에는 어느 집에서도 소장할 가치와 필요가 없어질 콘텐츠다.


겨우 역사가 몇 백 년 된 나라의 돈뭉치와 상품적 기술이 수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 이들의 가치를 헤손 하는 제3세계의 창의성을 예술적이며 사회적으로 구현할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 인문학적 토양의 빈곤은 한국 사회를 얄팍하게 만들고 있다. 복잡한 서사나 깊은 철학적 질문 대신,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소재들이 주를 이루며, 등장인물들의 내면적 갈등이나 심층적인 주제 의식에 대한 사회적 반응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 이는 비단 영화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 미술, 음악 등 여타 예술의 하향평준화, 문화의 양극화를 유도한다."

단기간의 성과와 성공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인문학에 대한 투자가 부족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영화는 한 사회의 지적 수준과 인문학적 깊이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으며, 우리의 거울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술영화는 그 허술한 문화 속에서 지적 허영을 위해 뽐내며 수십 년 동안 반복 하던 메시지를 지루하게 설교하고 있고 낮은 위치의 관객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상업영화는 상어처럼 그들의 얄팍한 정신세계를 먹이로 삼아 이제 글로벌로 활개치고 있다. 그것은 오늘의 20대 이하 청소년들의 현실을 보면 바로 드러난다. 이들의 특징은 당대의 지배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점이다. 입시지옥, 학교폭력 ,자살률, 사회기득권층의 교육 혜택 독점.

나는 최소한 그 마을에서 어떤 이들도 소외시키지 않는 평등하고 민주주의적 집단 창작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사회적 기업진흥원 담당자에게도 직접 전화를 걸어

이런 표현이 나왔는데 당신들도 이해가 되는 가?

안된다고 했다 직접 주의를 주겠다 까지 했었다.

아무리 사회적 기업 육성 기관이라 해도 사업성이 미비하다라든가, 사업성이 비현실적이라든가 , 의지만큼 계획이 철저하거나 , 준비성이 부족하다느니 , 체계화되지 못하든가라는 식의 표현이나 비판은 가능하겠지만 어찌 한 사람이 설령 명분이라 하더라도 사회적 미션을 수행하겠다고 사업을 하는데 취미 생활이라 운운한다는 건..

도저히 상상이 가능하지 않는 것이었다

또 한술 더 뜨는 경우도 있었다 " 자기 좋아서 취미생활 하고 고혈을 빨아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전문가연 하는 이들의 판단과 결정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나의 경우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부터, 포털, ebs다큐영화제, 지자체지방문화원에게 받은 모욕과 폭력은 트럭 하나에 담기도 부족하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이름을 밝혀도 난 아무 상관없다. 그 모든 폭력과 모욕의 기록들은 남아 있고 다른 피해가 없도록 숨길 필요는 더욱 없다)


'만개의 마을, 만개의 영화' 프로젝트는 단순히 영화를 만드는 것을 넘어, 각 마을에 담긴 사람들의 삶과 철학을 끌어내는 공동적인 과정으로 다가가는 인문학적 작업이다. 마을마다 숨겨진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이를 영화적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 자체가 우리 사회의 인문학적 깊이를 회복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영화는 소위 공동체 연극이나 공공미술적인 작업과는 달리 참여의 방식이 시간, 노동적인 측면에서 효율적이며 그간의 수많은 사례에서 보면 더 현실적이다. 다리 아픈 이들에게는 찾아가면 되고, 말 못 하는 이들에게는 침묵이 언어를 대신할 수 있다. 일단 자본, 시나리오작가, 혼자 지시하는 감독, 스타나 전문 연기자를 배제하고 가능한 영화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그 존재필요성이 크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을 넘어 글로벌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서구 중심의 문화 헤게모니는 전 세계적 현상이며, 세계화로 인한 문화 획일화가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 모든 제3세계가 공유하는 이 문제에 대해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대안 문화가 필요하다. 사라져 가는 토착 문화와 구전 전통을 예술적 참여방식으로 영화로 남기는 것은 인류 문화유산 보존 차원에서라도 시급한 과제이다.


AI기술의 발달과 스마트폰, 인터넷 보급으로 이제 전 세계 어디서나 이런 프로젝트가 실현 가능해졌다. AI와 합작이나 국가공동 제작이라는 것보다 낮고 가난한 단위에서의 사람과의 협력이 오히려 AI 시대에 더 필요하다.

기후변화, 불평등, 소외 등 글로벌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 공동체의 지혜와 경험이 모여야 하며, 마을 단위의 철학적 사유가 그들에게도 자존감 있는 참여를 필요로 한다.

수익을 위한 영화도 아니고 대안을 만들기 위한 영화는 더욱 아니다. 모두의 예술로서의 토종로컬영화는 글로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글로벌 문제에 대해 가장 낮은 단위에서 함께 고민하는 철학 축제이다. 우울한 지구를 위한 살아 있는 자들의 족보이며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렘브란트식 집단 초상화이다.

다음은 앞으로 답해야 할 질문들이다.

‘모두의 참여’라는 말이 실제 제작 과정에서 가능한가? 결국 누군가 기획·연출의 권한을 가지게 되지 않는가?

마을영화의 제작 과정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가? (예: 촬영, 편집, 상영의 주체)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유지하기 위해 어떤 과정과 장치가 필요한가?

자본·전문가·스타를 배제한 영화라면, 어떤 방식으로 배급·확산을 할 것인가?

“민주주의적 집단 창작의 노하우”가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을 통해 축적된 것인가?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참여도의 차이나 지루함이나 어려움을 어떻게 함께 극복하는가? 그 외의 질문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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