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가 개그맨 전0성 김0화가 나온 한 지방 방송프로그램에 잠깐 출연했다. 토크 중에 " 언제 한번 전0성선생과 함께 마을영화를 찍어 보시면 어때요?"란다. 줄곧 개인 다큐도 아니고 생활인들 +공동 창작이라는 기본 특징으로 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더라. 화가 나 볼멘 소리로 "안 돼요 " "그럼 00와는 요?" 이란다. 더 짜증이 나서 "안돼요 "그 뒤로는 그들도 질문하기가 겁나는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방송을 마치고 PD가 화가 뻔히 보이는 나에게 다가오지도 않고 " 다음에 제가 본사로 가서 다른 프로그램 할 때 연락 함 드리겠습니다" 란다.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시는 부르지 마세요 " 인간관계를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너무 짜증 나서 화를 통제하기 힘들었다.나의 이야기를 듣기위한 게 아니라 자기들의 틀을 정해놓고 그 합리와 보충의 역할을 강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이것은 누군가의 지식·경험이 사회적 지위나 명성 부족 때문에 불공정하게 평가절하되는 현상과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그 명망 정도를 기준으로 집중하는 경향이 그 사회의 문화민주주의의 지표라고 생각이 든다. 그들은 나의 마을영화에 대해서도 그 편견으로 인해 집중도가 옅어진 것이나, 그 유명도를 기준으로 적절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봄이 다름없다.
나는 마을이라는 공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을이라는 그릇에 담긴 사소하고 평범한 이들의 본래적 창의성과 이름 없는 자의 말과 존재가 삭제되는 현상을 운 좋게 극복한 것이다. 유명한 사람은 말 없이 꽃한 송이를 들어도 이해하려 애쓰고 무명한 사람은 산을 옮겨도 우공이산이라 하는 문화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나의 영화에서는 최소한 우주의 별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인식을 얻었다.
유명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창의성이 엿보이지도, 보려고도 하지 않는 시대. 눈을 떠도 딸 심청이를 보지 못하고 유명인을 찾을 심봉사와 다름없다.
마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우주적 무대다.
집, 골목, 장터, 들판은 모두 별처럼 흩어져 있으며, 그 속에 사는 인물들은 마을의 별이 된다.
별자리가 밤하늘의 질서라면, 마을은 땅 위의 질서다.
감독은 이 마을을 ‘세트’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읽고 연결하는 지상 천문학자가 된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몸은 별이고, 그 관계와 동선은 별자리를 잇는 선이다.
사건은 외부의 갈등보다, 마을 사람들의 관계 간격, 서로의 눈빛과 침묵, 생활 리듬 속에서 발견된다.
관객은 그 별자리를 따라가며, 마을의 질서와 인간 관계망을 스스로 해석한다.
이때 서사는 관찰과 발견의 과정과 감독의 최소이지만 최고의 설계여야 한다.
마을에서 몸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성별, 나이, 직업, 가족관계가 이미 사회적 질서를 각인시킨다.
여자는 남자의 역할을 대신하기 어렵고, 노인의 몸에는 청년의 이야기를 강제할 수 없다.
감독은 이 몸들을 억지로 바꾸지 않고, 주어진 몸의 정치학적 맥락을 존중하며 서사를 직조한다.
마을 속에서 몸은 단순한 연기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발언하는 정치적 주체다.
마을 별자리 서사론에서 연기는 기술적 훈련이 아니다.
생활 자체가 연기다. 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손짓, 밭에서 허리를 펴는 움직임, 서로의 눈을 피하는 침묵
배우는 감정을 과장하거나 빌런·영웅을 ‘재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고, 생활의 호흡과 리듬을 명상처럼 드러낸다.
이로써 연기는 감독의 지시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 발하는 빛이 된다.
상업영화가 스타와 플롯을 중심으로 기획된다면,
마을 별자리 서사론은 몸과 공간, 관계망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별자리적 질서위에 집단 상살력을 보탠다.
이 방식은 영화가 흥행을 위한 인위적 설계가 아니라, 존재·관계·공간의 질서를 드러내는 철학적 실천이자 삶의 축제임을 보여준다.
요약: 마을 = 우주 몸 = 별 관계 = 별자리의 선 연기 = 생활·명상 서사 = 발견되는 질서 감독 = 지상 천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