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종묘광장은 사람들로 빼곡하다.
차가운 바닥 위에 신문지를 깔고, 갈치할머니들이 내놓은 소주와 안주를 나누는 이들이 이곳의 귀족이다. 그들이 피우는 담배마저 부럽다.
젊을 적 골초로 살다 보니 자원봉사자가 건네주는 몇 개비로는 도저히 갈증을 달랠 수 없다. 담배를 마음껏 피워보고 싶다는 욕망은 오래전에 접었지만, 가끔 길거리 휴지통에서 꺼지지 않은 긴 장초를 발견하면, 쓰레기를 버리는 척 집어 들어 피워 문다. 그 순간은 비루하고 서글프다. 하지만 내 처지에 다른 길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내 얼굴에서 멀어져 가는 담배연기를 바라볼 때면, 이유 모를 평화가 찾아온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의 하루는 한줌의 햇볕을 따라 서성이다, 집에 돌아와 기억조차 남지 않는 잡담과 허망한 눈요기로 마무리된다.
광장을 스쳐 지나가는 젊은 여자들은 간혹 천사처럼 보인다. 그럴 때면 문득 후회가 엄습한다. 왜 내 아내에게 저토록 자유롭고 건강한 젊음을 선물하지 못했을까.
가끔 이곳에는 40대 전도사가 나타나 불쾌한 설교를 늘어놓는다.
“할아버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예수님께 기대세요.”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았다니. 하루도 이렇게 길고 지루하기만 한데, 그 말은 너무 잔인하다. 아무 대꾸도 못한 채 흘려들어야 하는 내 무력감이 더 원망스럽다.
며칠 전부터 얼굴이 보이지 않던 홍씨 영감은 병원에 누워 있다고 한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 북한산에 오르다 다리를 다쳤는데, 마취가 잘못돼 식물인간이 되었다지.
그처럼 건강하던 사람도 한 줌의 약물 앞에서 운명조차 빼앗긴다. 세상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닐까.
시위가 종묘에서 벌어지면 파고다로, 파고다에서 벌어지면 다시 종묘로 피해 다니던 날, 종로 극장 앞에서 달리던 청년과 부딪혀 넘어지던 김씨 영감도 있었다.
복이라는 게 무엇일까. 신문지 위에서 소주를 기울이는 이들이 부럽다. 담배조차 부족하지 않은 그 풍족함이 어째서 내겐 끝내 주어지지 않는 걸까. 그래도 내 삶에 여복만은 남아 있었던 듯한데.
요사이 광장엔 젊은이들도 자주 보인다. 특별할 것 없는 장면인데도, 힘깨나 쓰게 생긴 몇몇 중년들이 풍기는 은근한 위협이 괜히 신경 쓰인다.
어느 날 전도사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불려 나왔다.
그 건장한 중년은 전도사에게 오히려 누가복음 몇 장 몇 절을 읊어보라고 몰아세웠다. 긴장감이 돌자 군중이 몰려들었고, 나 역시 거기에 끼어 있었다.
주고받는 성경 구절의 대결 끝에 전도사는 고개를 숙였다. 뜻밖의 광경이었다. 처음에는 무료함에 시비나 거는 줄 알았는데, 결국 광장은 ‘건장한 중년’의 등장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권력의 등장. 평생을 살아오며 보아온 정치의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전도사의 자유롭고 무심한 말이, 우리 늙은이들 앞에서는 그가 권력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권력은 없다. 새로운 권력은 언제나 젊은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그러나 불편했다. 아직도 젊은 육십이 칠십 사이에 끼어들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힘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이럴 줄 알았으면 젊어 교회라도 다니며 성경을 외워둘 걸.
그날 전도사가 떠날 즈음, 몇몇 신문 귀족들은 벌써 그 중년을 초대해 소주를 따르고 있었다.
세상이란 결국 눈치와 실속의 질서.
십 년 전 아내가 늘 하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눈치도 없고, 변변히 해놓은 것도 없으면서, 자존심 때문에 실속 하나 못 챙기잖아. 결국 가족들만 고생시킬 거야.”
그 말은 옳았다. 아내는 병원 한번 마음 놓고 다니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사랑 한 번 제대로 돌려주지 못한 것이 이제 와 못처럼 박혀 마음을 찌른다.
문득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광장 사람들은 굳어버릴 종로의 거리를 걱정하며 발길을 재촉한다. 홍씨 병원이라도 들러야 할까. 뭘 사들고 가야 할 텐데, 호주머니에는 경로 승차권뿐이다. 아직 예순다섯이 되지 않은 이에게 팔면 몇 푼이라도 된다던데.
눈이 쌓이면 집 언덕길을 오를 수도 없겠다. 저번 겨울에도 미끄러져 고생했지.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두려워진다.
병원으로 갈까, 집으로 갈까.
멀리서 앰뷸런스 소리가 울린다. 점점 가까워진다. 웬일일까. 사람들의 발길이 내 쪽으로 몰려든다.
그러고 보니 내가 누워 있다. 미끄러진 자가용이 도로 옆에 비껴 서 있고, 사람들의 얼굴이 내 위로 겹겹이 내려다본다.
그 눈빛은 낯설다. 가여움과 연민. 그러나 아무도 내 아내처럼 눈물을 흘리진 않는다.
그 틈에서 ‘건장한 중년’의 얼굴이 보인다. 세상의 중심을 이렇게 정면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그는 내 눈과 얼굴, 가슴, 손목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그러다 경찰에게 중얼거렸다.
“살짝 부딪힌 것 같은데… 죽어버렸어. 사는 게 왜 이래.”
도착한 여의사가 내 눈과 손목을 다시 확인한다. 젊은 날의 아내와 꼭 닮았다. 아니, 어쩌면 아내 일지도 모른다. 아내다 .
그녀는 내 곁에 떨어져 있던 경로 승차권을 집어 들어 외투 안주머니에 넣어주며 말했다.
“이제 편히 쉬세요.”
편히 쉬라니. 전도사의 “예수님께 기대라”는 말과 닮았지만, 스무 살 젊은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은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내 얼굴 위로 내리던 눈발이 갑자기 담배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간다.
그러나 그녀는 가여운 듯 내 얼굴을 바라보다, 가져온 흰 시트로 내 얼굴을 덮는다.
흰 눈 내리는 겨울, 흰 시트에 가려진 내 모습이라니.
내가 죽은 것일까. 이게 죽음인가.
연고도 없는 나를 위해 누가 울어줄까. 누가 한잔 술을 기울여줄까.
살아 생전에도 없었던 일이니, 죽었다고 달라질 것도 없겠지.
눈이 천천히 감긴다. 내 숨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앰뷸런스의 소리 또한 멀어진다.
내 인생에서 가장 하얀 눈이 꺼꾸로 올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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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영화를 만들기 위해 쓴 글이다 . 촬영을 하려다 결국 하지 못했다 .
이 이야기를 영화로 찍고 싶다고 한 학생이 연락이 왔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 이제 AI로 만들어야 할까 ?
이 이야기를 쓴 이후 종묘공원에서 영화를 찍은 적이 있었다 .
내 이야기를 찍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 더 생생하고 더 아픈 이야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
종묘공원에서 장기판을 가지고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새로운 법이 생겼단다
언제 종묘공원을 배경으로 그들과 영화를 다시 영화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