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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군중(群衆)으로 키워진다

by 신지승

군중(群衆)이란 무엇인가?

네팔에서 SNS 금지정책으로 대규모 젊은 군중들이 모여 저항했다. 세계가 SNS로 연결된 새로운 군중의 등장을 경험하고 있다.

군중은 역사적인 변화와 흔적을 남기려는 행동주의에서 비롯되는데 현재의 가상공간에서 머물고 있는 문화적 군중의 존재를 밖으로 드러내 버렸다.


역사적으로 정치적 군중은 광장에 모였고, 권력을 향한 저항의 동반자가 되었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선 그들의 하위계층이기도 하다 정치적 주체조직이 그 성과를 독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치적 군중은 어느 단계에선 예술적 군중으로도 역할한다 정치투장의 현장에선 투쟁가와 저항의 공연이 흔하게 동반된다.

예술적 군중은 방탄소년단의 월드투어에서 10만 명이 일제히 보라색 물결을 만들며 환호한다.

11세기 십자군처럼, 3만 6천 쌍 (7만 2천 명)의 대규모 합동결혼식의 통일교의 압도적 시각적 위력을 통해 종교적 군중을 드러내고 있더.

정치적 군중 예술적 군중 종교적 군중은 , 종종 서로를 넘나들며 힘을 교차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군중의 등장 그것은 바로 반행동주의적 '창작적 개인'이다. 그 개인들은 새로운 형태의 창작적 군중이다.

러시아 알렉산더 보그다노프가 꿈꾸었던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인터내셔날의 이상처럼, 세계의 개인들이 창작으로 서로 연결될 때, 개인의 창작은 국경을 넘어선 새로운 언어와 감성의 시대를 유튜브 틱톡 OTT 등이 열었다.

개인의 창의성이 극대화되는 공간이며 새로운 창작의 영감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디지털 플랫폼은 또 다른 '창작적 군중'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유튜브의 구독자 1000만 명은 크리에이터 한 명을 중심으로 형성된 수동적 관객일 뿐이다. 틱톡의 바이럴 영상 역시 소수의 인플루언서가 생산하고 다수가 소비하는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 이는 보그다노프가 《프롤레타리아 문화》에서 비판했던 부르주아 예술의 구조—천재 예술가와 수동적 관객의 분리—를 그대로 재생산한다.


만드는 자 보는 자, 찍는 자 찍히지는자 구분되고 '창작적 군중'이 아니라 '예술적 군중'으로만 키워진다

나는 새로운 창작적 군중을 한국의 마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개념을 마을 공동 창작적 군중이라고 구분한다면 , 하지만 기껏 길섶의 돌탑을 만들어 가는 정도의 100여 명 단위의 숫자일 뿐이다. 그걸 군중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100명의 마을 100여 개라면 '군중'이라고 할 수 있을 수도 있다.

만들고 보는 자의 경계, 찍는 자와 찍히는 자의 경계, 다큐와 드라마의 경계를 해체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개인의 성찰과 마을의 축제를 위한 인문학 축제로서 나름 역할했다. 이 창작은 제한된 창작 방식이 될 수 있다. 굳이 마을로 한정해서 온전한 개인의창작도 아닌 공동 창작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창작은 언뜻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개인 소외 ,창작의 소외를 심화시킬 수 있다. 마을'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단순한 장소를 넘어, 활용되지 못하는 여린 존재의 상징이기도하고 , 인간적 교류를 통해 상품이 아닌 순수 창작의 의미를 회복하고, 디지털 시대가 낳은 마당의 소외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의 상징공간이기도 하다.


그들의 행동, 참여는 권력을 향하지 않는. 그들은 삶의 바탕에서 솟아오른다. 마을의 골목, 공동의 밥상, 생활, 노동의 현장에서 개인과 공동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곳에서 창작은 감독이나 개인의 천재성에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적 감각의 연장선 위에 놓인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아이들은 시대의 다양한 군중에 휩쓸리게 된다.

정치적 군중이 순간의 폭발력으로 세상을 흔든다면, 마을 창작 군중은 일상의 지속성을 통해 삶을 새롭게 짓는다. 종교적 군중이 초월적 목표에 자신을 내맡긴다면, 마을의 창작 군중은 땅에 발을 딛고 노동과 생활 속에서 창조의 가능성을 일군다. 이들의 무기는 선동이 아니라 일상의 노래이고, 깃발이 아니라 공동의 관계와 손길이다.

강원도의 작은 마을에서 그려진 한 장의 그림이, 아프리카의 공동체 노래와 공명할 수 있다. 부산의 골목에서 찍힌 생활영화가, 남미의 마을극과 나란히 설 수 있다. 오티티 틱톡 유튜브가 남기고 있는 재미와 선정성에 가려진 로컬의 그림자를 제거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나는 이 가능성을 또한 보그다노프의 ‘창작적 인터내셔널 군중’이라 부르고 싶다.

정치적 군중이 저항으로, 종교적 군중이 신앙으로 세계를 묶었다면, 마을 창작적 군중은 생활과 예술의 연대로 세계를 묶어 나갈 수 있다.

이제 인간존재의 AI 가상화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것은 거대한 블록버스터 드라마나 종교권력의 영향이 아니라, 서로 다른 마을과 공동체들이 작은 창작의 불씨를 교환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결국 우리 아이들은 어떤 형태의 군중 속에서 자라나고 성장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혈혈단신 돈키호테는 거대한 암벽에 묶여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형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AI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전통적인 '직장'의 개념이 해체되면서, 누구나 예술로, 창작으로 늘어난 여유의 시간을 스스로 돌봐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일상적 창작으로 생활을 꾸리려는 의지가 더 거세어 질지도 모른다. AI가 일하고 돈 벌고 인간들은 기본소득으로 생계형 창작이 아니라 인터내셔널 순수창작으로 살아갈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미래의 군중은 광장의 저항적 함성보다 가상공간의 SNS 군중보다 ,

마을의 생활 창작의 군중에서 기억내고 자라 날 수 있을 것이다.


‘국경을 넘어선 창작의 공동체’라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마을을 만들어 가는 방법 중의 하나가

돌탑처럼 자신의 아픔, 소원을 쌓아 올라가는 서로의 공동 돌탑에서 그 원형을 찾는다.

무거운 돌을 가벼운 돌 위에 놓지 않으며 , 그 돌탑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공동창작의 땀과 긴장

누군가는 돌탑의 꼭짓점보다는 그 탑의 튼튼함을 위해 밑변에 돌 하나를 놓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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