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행복지기 위해선 '삶이 그들만의 축복이 아니라는 돈과 권력의 그림자를 최대한 밑변의
일상에서 지우는 것이다.
계급의 문화를 지우고 가리기에는 가까운 시간안에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현실 가능한 가장 빨리, 가장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가장 확실한 것은 돈을 버는 일인가 그것은 국가정책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추구해 나갈 일이다.
또 다른 방법중 하나는 가난한 밑변들이 , 가진 자 들의 인문학(관념론-충,효 ,유뮬론-저항)과 다른 '밑변의 인문학(관계의 수평) '으로 무장하는 일이다.
그런데 피라미드 밑변 중심만의 철학적 배후가 그렇게 든든하지도 않다 . 추상적이고 거창한 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자존감을 높이는 그 무엇을 해야한다 .그 마중물의 하나가 전 국민의 자서전 전 국민의 마을영화다
아테네는 참주에 의한 디오니소스농촌축제의 극장에서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연극을 통해 철학적 사고를 했다.그 공연을 통한 민중들의 깨우침으로 인해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열었다.축제를 통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정치가 무엇인가를 1만8천명의 대규모 극장에서 아주 효율적으로 민주주의를 선행 학습했다 . 기원전 6세기 저항의 낡은 정치적 상상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이제는 협력의 상상이다.
지금 ‘이야기 세계전쟁’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전쟁은 권력층,기득권층의 몫이다.
넷플릭스가 전 세계 시청자의 상상력을 점령하고, 중국정권은 역사적 서사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며, 몇 몇 나라의 자본들과 연기자들은 소프트파워 경쟁으로 인해 돈 버는데 정신이 없다 .그걸 마냥 국가,민족적 문화적 정체성과 연결할 뿐이다 . 한류로 양극화는 가속화되고 문화제국주의로 또 다른 로컬의 문화를 위협한다.
정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최근의 탄핵 논쟁은 ‘내란’과 ‘구국’이라는 상반된 서사로 대체되며, 법리 자체보다 누가 국가 정당성의 이야기를 독점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 된다. 그러나 시민의 시각에서 보면 이는 단순한 굿판일 뿐이다. 표면적으로는 관객처럼 보이는 시민도, 실제로는 최종 판정자로서 이야기의 향방을 결정한다.
이번 정권이 어떤 성과를 낼 것인가에 따라 이야기의 반전은 매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그 모든 것에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가 가진 힘이 커질수록, 그 이야기의 '주인'을 찾으려는 경쟁도 치열해진다.
심청전 역시 이러한 상상력의 주인 찾기라는 문화 전쟁의 한복판으로 다가 올 수 있다.
중국은 심청전의 원천을 자국의 역사와 지리에서 찾으려 한다. 중국의 난징을 배경으로 한 판본이나 주산 군도에서 전해지는 실존 인물설은 이야기에 역사적 실체감을 부여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들은 '심청전'이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한중 해상 교류의 역사적 맥락 속에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을 다룬 실화임을 강조함으로써 이야기를 자국의 문화유산으로 편입하려 한다. 중국에게 심청은 자국의 광활한 역사와 풍부한 지리적 배경을 증명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과거의 정치 왕조들은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국민들의 상상력과 서사마저 지배하고 말았다.
심청전의 일부 판본이 중국을 배경으로 설정된 것은, 고대부터 이어져 온 한중 관계 속에서 이야기가 정치적으로 이용된 흔적을 보여준다. 중국에 의해 연결된 정치 왕조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의 정신과 상상력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이다.
지금은 글로벌 자본을 중심으로 한 OTT이야기에 광분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 심청전은'효(孝)'라는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가 집약된 민족의 이야기로 자리 잡았다. 설화의 원형이 무엇이든, 심청전은 판소리로 불리고 한글 소설로 정착하는 과정을 거치며 한국 특유의 해학과 풍자가 더해졌다. 뺑덕어멈 같은 풍자적 인물이나 심봉사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은 한국인의 삶과 감정, 희로애락을 그대로 담아내며 '한국적' 서사의 정체성을 완성했다.
한국에서 심청은 역사적 사실 여부를 넘어, 한국인의 정신적 DNA를 공유하는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이처럼 '심청은 누구의 상상력인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기원(origin)을 밝히는 작업을 넘어, 이야기가 문화적,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오히려 이야기가 여러 문화와 만나 어떻게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다. 그러나
중국정치권력은 이야기의 역사성의 불가피한 흐름를 마냥 용납 할 수 있을까 ?
우리는 근본적으로 중국의 정치 왕조들에 의해 연결되고 지배당했던 상상력의 역사를 끊어내야 한다.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은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공유하는 사람들 그 자체일 것이다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마무리해서는 안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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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원천 소스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단순히 옛이야기를 답습하는 것을 넘어, 현대 사회의 고민과 가치를 투영하여 이야기를 재발견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한 사람의 창작자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마을 영화나 지역 문화 콘텐츠를 통해 더욱 그 대안을 마련 할 수 있다
새로운 이야기의 싹을 틔우는 가장 비옥한 토양은 지금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에서 그 원천을 삼는 전략이 가장 확실한 것이다.
진정한 원천소스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춘다.
첫째, 시간의 검증이다. 심청전과 춘향전이 수백 년간 구전되어 살아남은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둘째, 집단 지성의 축적이다. 수많은 입을 거치며 다듬어진 이야기는 공동체 전체의 지혜와 정서가 켜켜이 쌓여 있다.
셋째, 개방적 서사 구조다. 누구나 자유롭게 변용할 수 있어 이야기는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며 살아남는다.
반면, 현대 미디어 플랫폼은 현재적 가치는 크지만 원천소스로서 한계가 있다. 상업적 공식, 알고리즘 종속, 저작권 장벽, 빠른 소비 사이클 속에서 집단 지성의 검증을 거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글로벌 OTT는 문화적 타임캡슐일 수는 있어도, 세대를 넘어선 씨앗은 되지 못한다.
적은 서사 독점 전략이다. 특정 기업, 플랫폼, 국가가 이야기를 독점하는 구조와 규칙을 만들고, 알고리즘과 유통망, 문화적 권력으로 서사를 통제하여 지역과 공동체의 서사의 자발적인 생산을 억압하게 된다.
글로벌 자본은 단지 그 전략을 실행하는 수단일 뿐, 적을 단순히 ‘자본’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전략적 사고와 창의적 대응을 가로막는다.
따라서 승리하려면 독점 구조를 깨는 것이 핵심이다.
마을 공동체, 생활인과 전문 영화인이 공동 창작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서사가 지역에서 세계로, 세계에서 지역으로 흐르도록 설계해야 한다.
중앙 집중형 플랫폼이 아닌 분산적·동시다발적 3세계 서사 연결망(만개 영화글로벌 제작 ) 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