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장자의 영화
선댄스영화제를 만든 레드포드가 죽었고, 부산 국제영화제가 개막하는 날이다. 같은 시대와 시간의 강을 타고 왔는데 왜 나는 여기에 있나? 나는 어디로 흘러 가고 있나? 나의 모자람과 쓸모없음을 마주하는 공포를 맞는다.
꿈속에서 누군가가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너무나 어려운 질문들이 빗발치는 화살처럼 쏟아진다.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나라에서 '돌'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 영화감독. 김기덕과 홍상수의 즉흥과 영감을 '돌'에게로 되돌려주는 영화를 찍고 싶은 감독. 한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29일 동안의 최장 로컬노마드 끄트머리국제영화제를 열고 있는 .그 감독들보다 더 일찍 영화를 시작했고, 더 많이 찍었다. 나에게 있어 '돌'이란 영화를 모르는 사람, 일상에서 영화와는 관련 없이 사는 사람들, 연기를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극영화를 만든다는 의미의 상징이기도 하다.
나에게 주어진 에너지와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며 발악하며 살았다. 그러나 참담한 하루하루만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저 영화 한 편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영화는 쉬지 않고 충분히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에너지를 고갈시켰다. 나는 그 때문에 늪에 빠져 홀로가 되었다. 아이들은 아빠처럼 살고 싶어 하지 않게 되었고 . 나의 긴 시간은 편안한 생존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택이 없다. 모든 노인이나 사람이 그러하듯, 지나온 시간을 유일한 재산 삼아 버티고 있을 뿐이다.
역사 속 저항의 전사도, 독립영화의 깃발도 아니다. 스파르타에서 전사로 키울 수 없다고 판단된 약한 아기를 버리던 아포테타이(Αποθέται, Apothetae) 같은 마을에서 영화를 만들 기술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돈 없으면 못만드는 영화와 달리 돈없어도 인내를 가지고 만들어 낼 수 영화의 탄생이다 . 그게 내 쓸모없음이 쓸모 있어지는 순간이고, 존재 그 자체가 의미가 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쓸모없음의 이야기는 사실 너무나 흔했다. 특히 쓸모 많음의 사람들이 모두가 태어날 이유를 가지고 태어났다며 쓸모없음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자후를 토하였다. 그게 인문학의 역사다. 그러나 모두 안다. '효용'과 '속도', '성공'과는 다른 위치에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 또한 뛰어난 의지와 불굴의 투혼을 발휘하여 쓸모없음을 이긴 자들은 쓸모 있음의 세계에 편입될 뿐이었다. 무엇보다 가족, 친구, 이웃, 마을에서 과연 통용될 수 있는 삶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서로 통용될 수 없는 문자와 언어는 얼마나 우울한가? 그냥 존재로만 우리가 축복하는 삶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면, 노인들은 스스로 농약을 음독하지 않을까? 굳이 농약을 음독하지 않고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것인가? 삶이 축복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보여주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 한국 DMZ에 묻어 놓은 지뢰 수만큼도 안 되는, 삶이 축복임을 깨닫게 하는 우리 사회 곳곳에 숨겨놓은 보물찾기 같은 이벤트들은 존재하는가? 빨리 달리기가 아니라 운전면허 시험보다 더 어렵게 코스를 정해 누가 안전하게 결승선에 도달하는지, 할아버지와 손자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휠체어 대회를 상상해본다.
「도덕경」 48장 “爲學日益,爲道日損。損之又損,以至於無爲。” (배움은 날마다 더하고, 도는 날마다 덜어낸다. 덜고 또 덜어 무위에 이른다.) 그렇다면 쓸모없음에 대해 우리가 행복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점점 술에 의지하고 짜증이 더해가던 나는 점점 폭력적인 사람으로 변해 간다. 어느 날 밤길을 거닐다 건물 아래에 누워 버렸다. 꿈속에서 나는 춘추전국시대의 영자(影子)가 된다. 장자와 노자의 제자가 되었다가 버려져 혼자가 되었다. 혼자 중얼거렸다.
"이것은 깨달음의 영화이노라. 노자와 장자의 무위와 무용의 깨달음을 이어가는 영화이노라. 쓸모없음의 고통을 직면하게 만드는 영화적 장치이면서,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쓸모 있음'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있도다.
'쓸모 있음'이 아니라 '살아 있음' 그 자체를 확인하는 작은 마을 단위의 인문학 축제가 될 수 있노라. 캐스팅도 없고 주연, 조연은 쓸모 있음을 가리는 것이니 너의 선택이니라.
사전 시나리오가 없기에 감독의 역할보다 너의 삶과 관계에서 모든 것을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연쇄 살인이나 불륜과 폭력 사건보다 모자라고 쓸모없음의 관계의 순간들을 철학적 이유로 이어 붙이고, 참여한 관객(만드는 자와 보는 자의 경계가 없기에 관객이라는 개념은 소멸된다)
스스로 자기 쓸모에 대해 다시 서로 묻고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이기도 하노라.
시나리오도 감독도 스타도 주연,엑스트라도 노동도 자본도 마케팅도 모두가 없어진 영화이노라.
그 대신 삶이 전하는 이야기 ,감독 개인의 창작 대신 집단 지성과 오랜 경험이 빚어내는 공동창작
이대로 가다간 돈과 잘난 이들, 돈과 성공에 집착하는 이들의 호주머니를 채워주고 가까운 이들을 쓸모없음의 대상으로 삼는 시대가 올 뿐이다.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갈 수 없다고, 아무나 연어가 될 수 없다고. 수많은 성공 스토리를 보고 인생을 보냈는데 왜 더 많은 이들은 그것을 모방하기만 하고 피라미드의 꼭짓점에 설 수 없을까?
이것은 쓸모없음을 줄이고 그 근거를 제거하는 과정이로다.
이 과정을 통해 관계가 이어짐으로써 작은 단위에서의 '쓸모없음'의 종자가 줄어들 것이다.
개인이 아닌 관계 속에서, 경쟁이 아닌 연결 속에서 발견되는 한 사람이 혼자서는 쓸모없을지라도, 누군가와의 관계 안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는 순간들이 다가올 것이다. 살아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 숨을 쉰다는 것, 눈을 뜬다는 것,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이 단순한 행위들이 어떤 효능보다도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깨달음이로다.
돈·성공·속도, 대중의 논리에 포획되지 않는 논리의 버팀을 위한 영화이노라.
자본의 언어가 아닌 존재의 언어, 효율의 문법이 아닌 관계의 문법으로 내 삶을 다시 읽어내는 것. 느림의 철학, 모자람의 미학, 실패의 존재론이다. 단순한 위로나 자위가 아니라 쓸모없음의 세계관의 비밀 기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모자라지 않은 존재는 없노라. (「고린도후서」 12: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바로 그 모자람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한다. 모자람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생각을 눈앞에서 보게 될 것이다. (전도서 4:9-10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모자람들이 만나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모자람들이 모여 생전 보지 못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충격이었다 .더 이상 이야기가 책상 위에서 챗GPT에 기댈 필요가 없을 것이노라. 각자의 부족함이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 그 자체가 아름다워지는 아우라의 순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단지 그 순간일 뿐일 것이다. (시편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
모든 기적이 모든 성령이 그렇듯 너무 흔하면 가치롭지 않노라.
그리고 부족함이 채워져야 하는지, 아니면 그대로 있어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지 그 다른 둘을 화두처럼 잡고 너희들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노라. (「장자」, 齊物論 “彼亦一是非,此亦一是非。彼亦一是非,與彼亦一是非,則無是無非。” (저것도 옳음이고, 이것도 옳음이다. 옳고 그름이 다 옳고 그름이라면 옳고 그름이 사라진다.))
언젠간 AI시대 인간은 불가피하게 모자람과 쓸모없음을 마주할 것이다 . 결국 모든 인간은 모자람과 쓸모없음에 대해 고민하고 짜증내는 인간다움으로 살아 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