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현진건문학상 수상작가 이도원 소설 '나는 죽었다'에 나오는
"산자가 죽은 자를 살린다"는 문장을 읽는 순간
예수의 가치를 살린 기독교의 역사를 떠올리거나 결초보은의 고사성어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 하나의 문장이 끌고 가는 힘은
적확한 언어와 삶을 보는 깊은 눈 그리고 경험이 녹여진 문장, 깊은 산중에 있을 법한 스님의 법문 같은 깨달음의 언덕을 따라 올라 가게 만든다. 가상의 세계를 꾸며가는 현실적 감각이 너무 단단하다.
단단하기도 하고 맨바닥의 진흙더미에 숨겨졌던 말하기 거북했던 돈과 남자에 대한 질긴 감성을 만나게 한다.
그래서 혹시
이 작가의 경험이 아니면 알 수 없을 디테일의 정체마저 궁금해진다
이도원의 소설에는 누워있는 노인이 자주 등장한다. 간병을 받아야 하는 존재나 간병을 하는 존재들이
이렇게 자주 등장 하는 소설도 보기 힘들 것 같다.
짧은 단편마저도 쉽게 산을 걷게 하는 트레킹이 아니라 오래전 올라갔던 그 높은 산을 다시 올라가는 느낌이다.
드디어 산의 정상에 다다랐을 때 느껴지는 건 위안과 힐링의 멋진 세계의 뷰가 아니다
혹한과 뜨거운 열을 버티고도 살아있는 뼈대 같은 나무 하나가 떡 하니 버티고 있다.
고령화, 노인의 경제적 양극화, 노인 우울증, 노인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인 이 땅에서,
나와야 하고 나왔어야 하는 숨겨졌던 이야기이다.
2005년 인가 부산 일보 단편 소설로 등단한 작품 '무화과나무 아래 그를 묻다'를 읽은 적이 있다.
(「무화과나무 아래 그를 묻다」에서는 사람이 얼마 살지 않는 마을에서 폐암 말기 환자인 시아버지를 홀로 돌보는 여성이 등장한다. 전 재산을 상속받은 남편은 학업을 빌미로 프랑스에서 떠난 후 돌아오지 않고, 네 명의 딸은 그런 아버지를 외면한다. 병원에서도 가망 없는 그의 치료를 거부한다. 가족 중 유일하게 혈연으로 엮이지 않은 며느리가 배변을 가리지도 못하고 점점 죽어가는 시아버지를 보살피며 고립되어 간다. )
20년 후인 지금 나와야 할 소설이 너무 일찍 나왔다는 생각을 며칠전 스치고 지나갔었다.
참 빠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빠른 게 아니라 삶의 최전선에 서 있었던 것이었고 먼저 아파했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농촌의 마을을 다니며 가장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농촌의 노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
2010년 강원도 인제 어느 마을 함께 영화를 찍었던 가난한 두 노부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행복한 마을로 대통령상까지 받았던 그 마을에서 두 노부부와 또 몇 분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다.
전통 봉건적인 문화에서 적절한 보호를 받으면서 죽지 않을 정도의 노동력과
서로의 위로로 견뎌낼 것 같았던 나의 환상은 깨졌다.
얼마 전 시골 숙모가 돌아가셨다
큰 도로변 아랫담 삼촌집은 항상 사람이 많았다. 일꾼도 있었고 구멍가게를 하다 보니 항상 누군가가 오고 갔다. 아구 성호 왔냐 밥 먹고 큰집에 올라가라 아무리 바빠도 몸과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가면서 그게 왠지 더 선명하게 남겨졌다
장례식 식당식탁에는 하얀 종이컵과 식탁보 가장자리에는 굵은 글씨로 NAVER가 적혀 있고, 비닐 포장된 일회용 숟가락에는 SAMSUNG 로고가 새겨져 있다. 한쪽에는 신한은행 로고가 크게 자리한 종이 케이스가 놓여 있다.
이 풍경은 마치 한국 사회의 거대한 기업들이 작은 자리 위에 모두 모여, 상징하는 바가 흥미로웠다
아들 딸 사위가 다 일에 있어 굳건하고 심성의 뿌리가 깊다
산자가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지병으로 힘들게 버티다가 돌아가셨을 숙모에 대한 이미지가 사라지고 자식을 잘 키운 숙모의 웃음이 떠 오르게 한다.
산자가 죽은 자를 살리고 죽은 자가 산자를 살린다.
산자가 산자를 살리는 경우보다 많은가?
이도원 작가의 소설다운 소설이다. 벽돌 하나하나 올라가면 전체 이야기의 전망이 펼쳐진다.
끝은 해피엔딩이나 열린 결말과는 다르다.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숨은 구조다.
이도원 소설의 '이름'은 병무청 직원 '안중근'의 이야기이다.
이름값을 하는 코믹 하면서도 굉장히 영화적이면서 문학적인 기술이 탁월하다.
역시 사회를 관찰하는 게 표피적이지 않다.
군대 내의 폭력과 우리사회로 연결된 이야기이다.
나는 원주 토지 문학관이나 증평의 21세기 문학관에서 나름 많은 작가들을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우선 그의 과거 작품들을 최대한 찾아본다
어떤 작가는 머리로 쓴, 어떤 작가는 가슴으로 쓴, 소설들을 만난다
그들과의 사적 공간에서의 만남은 그들의 작품에서 언뜻언뜻 보이기도 하고 사적인 느낌이 거스러지 않고 온전히 작품에 드러나기도 했다.
목수라는 말의 브리꼴레르는 논리로 지식을 축적한 사람이라기보다 체험적 깨달음으로 노하우를 체득한 전문가다.
이도원 소설가는 분명히 자신의 체험적 깨달음을 근간으로 독자에게 감성적으로 다가가는 작가임이 분명하다. 감독들이 웹툰이나 소설에서 영감을 받고 기획을 하는 경우가 지금도 많다. 상품을 생산하기에는 그보다 효율적인 방법도 없다. 실제 바닥에서 스스로 부딪히고 아파하고 상처받으면서 글이나 영화나 웹툰이나 만들어내는 작가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표시가 나는 법이다.
이도원작가는 분명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그 지독한 간병을 경험했을 것이다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나는 또 궁금하다.
이도원작가가 보여주는 삶의 밀도와 주제, 궁극으로 도달한 혹한과 열을 이긴 러시아 낙엽송 같은 삶의 인식에 대한 문제다. 보통 사람들이 돈과 남자의 세계에서 가지는 그 인식을 소설 속 주인공들이 하게 된다면 그 등장인물들은 이미 소설 안에서는 살 수 없으며 소설 밖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생각은 단순하지 않다.
어떤 생각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책과 경험, 패거리의 배후가 없이는 그 생각을 보듬고 살아내기는 쉽지 않고 실제적으론 불가능하다.
가난한 자에게 몇 달을 버틸 돈을 건네는 만큼이나 인문학을 건네기도 쉽지 않다.
세상은 인문학의 가치를 조롱하고 가난에 허득이느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소설 '세 사람의 침대'는 네 사람의 침대 같다.
가난 때문에 도서관과 다른 남자를 오고 가야 하는 여자
움직일 수 없는 야망의 남자. 세상의 윤리적 부조리를 버텨내지 못하는 남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조망하며 작가로 살아가는 작가. 담배와 라이트가 화재의 원인이 아니라 생각 하나의 차이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만들고 지옥 같은 세상을 불태워 버리고 만 것은 아닌가?
이도원 작가는
"나는 견뎌왔다. 불과 얼음을 함께 이고서라도 여전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인간이란 혹은 남자란 존재는 결국 이 무화과나무 앞에서 묻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불길 속에서도 살아남게 하고 , 그 나무를 생존을 넘어서 사유의 상징으로 삼으려 하고 그 무게를 애써 짊어지기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 애증을 품는 걸 마다하지 않는 , 그들의 배후의 논리를 스스로 제공하며 사유의 옷을 입히려 하는 , 그리고 총체적인 지옥의 질서를 인정하며 그 속에서 견디는 방법들이 담겨있는
소설 다운 소설.
현진건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운 글들. 그 또한 이미 올라가 본 산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차근차근 천천히 읽으며 올라야 할 것 같은 소설.
"산자가 죽은 자를 살린다"말은
어쩌면 오늘날 작가들이 상품의 자장으로 인해 무시해 버린 숙제이기도 하고 앞으로
해 내어야 할 작가의 화두이기도 하다.
아마 이 짙은 진국의 소설이 어느 누군가의 경험 없는 상품적 영감을 만나 값싼 포장지의 웹툰이나 영화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산자가 발 빠른 산자를 살리고 오리지널티에 대한 경의를 잃을 수밖에 없는, 몸 없는 AI창작시대에 태어난 게 위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