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소년시민군 김향득사진 작가
2025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그저 사고였을 뿐>은 고문 피해자 '바히드'가 자신을 고문했던 외다리 남자 에그발과 외나무다리 위에서 다시 마주하는 이야기다. 영화는 극단적인 설정으로 시작하지만, 현실 속에서 이런 만남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설령 만난다 하더라도 영화처럼 '복수의 드라마'로 번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래서 리얼리티 측면에서 보자면 일종의 해프닝이다. 개인적인 정치적 복수는 허구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상상과 감정의 질서다. 그렇기에 영화는 현실의 불가능성을 상상으로 메운다.
상상은 허구를 통해 보이지 않는 대결, 즉 관념의 충돌을 가시화한다. 그 희소한 개연성(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일어날 법한 가능성) 속에서 리얼리티(Reality-실재처럼 느껴지는 힘)를 최대한 끌어올려 관객을 극 속으로 끌어들여 현실의 상처를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영화의 시작 부분은 그런대로 흥미로웠다 .그러나 대개 이런 영화들은 엔딩에 있어서는 감정에 치우치고, 논리의 균형을 잃는다. 감정적으로는 피해자에게 동조하면서, 그것을 '성찰' 혹은 '통찰'이라는 이름의 프로파간다로 포장한다. 내가 볼 때 이 영화도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제 해남에서 카톡이 왔다. "사진 맨 왼쪽 김향득 형, 망월묘역에 심은 날. 누군가 올린 사진인데 감회가 새롭네요." 그 사진속에는 그와 함께 나도 있었다 .김향득 작가가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줄 몰랐다. 페북을 안하다보니 근황에 둔해졌다.
고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투병하던 5·18 사진가 김향득, 강진을 갈 때마다 보았던 그 선하고 순한 눈빛. 그의 눈에는 초탈한 이들만이 지닌 투명한 평화가 있었다. 그런 눈빛은 고통을 오래 감내한 사람에게만 생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전쟁의 경계 위에 서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 속에서조차, 진짜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정치세력이거나 구조이거나 이데올로기다. 고문을 한 사람도, 당한 사람도 결국 어떤 체제와 신념, 관념의 중심 혹은 하위 세력으로 존재한다. 그들의 많은 이들은 완전한 자기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채, 관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수동적 행위자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
<그저 사고였을 뿐> 속의 고문 가해자 아틀란은 "나는 신의 뜻에 따랐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너희들이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아 나를 모욕하는 것 같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인간성을 잃어갔다고 말한다.
그에게 고문은 종교적 의무이며, 이슬람신정 체제의 질서를 지키는 행위였다. 반면 영화 속의 피해자는 자신의 상처와 고통,폭력만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관념의 대결, 즉 서로 다른 세계관의 충돌이 존재해야 한다. 이 영화가 진정한 리얼리티를 얻으려면 폭력,상처의 표면을 넘어서, 그 관념의 구조를 조금 더 파헤쳐야 했다. 대부분의 영화가 여전히 피해자의 상처만을 부각하거나 피해자의 선함만 강조하고, 전쟁의 핵심 논리의 층위를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문 피해자는 가해자 아내의 출산을 도우며 심지어 병원비까지 떠맡는다 . 선악 이분법적인 구도속에 인물들을 놓는 낡은 구도이다.
영화는 또한 너무 흔한 공포영화의 관습적 엔딩을 가져왔다. 관객을 극장 안에 가두어두려는 듯, 영화 속 가해 인물의 폭력성을 쉽사리 잊어져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와, 아직도 과거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피해 인물의 끝없는 상처를 상대 체제의 부조리한만 까발리는 ,유구한 영화 교과서적인 결론을 반복하는 정치로 끝맺는다.
이 엔딩이 없다면 너무 밋밋한 베스트 극장류의 tv드라마가 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익숙하고 뻔한 역사적 마무리다. 정치적 갈등과 투쟁을 해소할 영화적 엔딩은 오래전부터 가장 어렵고 힘든, 쉽지 않은 궁극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사회 정치적 이야기꾼들이 그 엔딩을 표현하기에는 사실 내공과 공부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영화를 내 친구나 이웃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 영화적으로는 정치예술적 시도와 너무 흔한 이야기를 다시 피하지 않고 천착했다는 점, 이란 신정정치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미국의 정치적 태도에 동조하는 깐느영화제의 정치적 퍼포먼스가 결합된 결과일 뿐이다.
김향득 작가를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고문한 이를 찾지 않았다. 찾았다 해도 개인적인 복수를 할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관념을 가지고 투쟁한 이들은 그런 상상을 하지 않는다 . 영화속의 그런 바보는 이 세상에 없다 . 이란감독의 상상에는 있을 지 몰라도 .
그는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그의 삶에는 관념과 더불어 삶의 리얼리티가 있었다. 이 정치사회적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두드리지 못하는 한계가 분명하다.
국내외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최고작" "자파르 파나히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등 그들은 앞다투어 찬사와 호평을 늘어놓는다. 그냥 우습다.
관념의 전쟁에서 관념의 논리가 실종된 것이다 .폭력을 누가 사용했는가 먼저 사용했는가는 이런 영화에서 이제 본질적인 게 되어서는 안된다 .6.25가 남침인가 북침인가가 본질적인게 아닌 것과 같다. 국제작 냉전구조와 그 관념을 내면화한 세력들의 구조가 핵심인 것 처럼 .
고통의 시간을 지나 자기 치유와 인간 회복의 과정을 묵묵히 보여주었던 김향득 작가의 엔딩과 등장인물들의 관념에는 너무나 큰 구체성의 차이가 있다.
이슬람 혁명 세력과 그 반대편의 싸움 속에서, 나는 이 영화에서 여전히 이란의 신정체제에 대응하는 세력의 관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상처보다 더 궁금한 것은, 그들이 어떻게 그 상처를 견디며 어떤 세계관의 관념에서 서로 독특하게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다. 영화가 다뤄야 할 리얼리티는 관념의 충돌뿐 아니라, 소시민적 어설픈 영화적으로만 소비되는 복수극이 아니라, 그리고 그 한우 곰탕처럼 수없이 우려먹었던 폭력의 공포가 아니라, 그 속에서 인간이 다시 살아가는 구체적이고 리얼한 힘이다.
헐리우드 유대인 자본의 히틀러를 유대인 학살이라는 폭력만으로 영화를 생산 소비할 시간은 지났다 .그의 정치적인 논리와 관념이 왜 탄생했는지 왜 대중을 장악했는지의 리얼리티를 피할 수 없다.
고교생 5·18 시민군 고문 당해 평생 그 휴유증에 살아간 김향득 작가가 보여준 한 편의 드라마에 미치지 못하는 어설픈 베스트극장류의 드라마 한 편에 찬사만 퍼붓는 진영 세일즈맨들의 소란이 못내 징글징글하다.
이런 식으론 정치사회적 영화의 대중성의 미래는 없다 .
파나히의 영화가 도달하지 못한 고문 피해자의 관념의 리얼리티의 그 깊이와 멋진 엔딩은, 정치적 의례성관습성을 벗어난 상처의 삶을 지탱하는 관념의 범위와 무게에서만 나온다.
역사 정치적 상처들은 그저 단순한 우연의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 정치적 논리, 구조적 폭력,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빚어낸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그 상처를 다루는 예술은, 단순히 피해자의 고통을 감정적으로 소비하거나 가해자의 악행을 되풀이하는 공포의 재연을 넘어, 그 필연의 원인을 해체하고 새로운 관념의 지평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파나히 감독의 영화가 멈춰 선 지점은 바로 이 해체의 작업이다. 영화는 고문 피해자의 '복수'라는 소시민적 감정을 극대화함으로써, 그 고통을 유발한 '신정체제'라는 거대 관념과의 대결을 회피하고 만다. 복수는 당장의 카타르시스를 줄지 모르나, 상처를 영속시키는 감정의 덫일 뿐, 새로운 삶의 동력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엔딩은 복수가 아니라 해방이다.
고문 후유증 속에서도 "투명한 평화"를 지녔던 김향득 작가의 삶이 웅변하듯이, 고통을 관념화하고 삶의 동력으로 삼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태도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실재적인 저항이다. 이는 폭력의 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나는 너희가 원하는 피해자로 머물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존재론적 승리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사회적 영화의 미래는 폭력을 극화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뚫고 새로운 삶의 양식과 관념을 창조하는 인간의 정신을 포착하는 데 달려 있다. 그 지점을 외면하고 관습적 엔딩과 정치적 의례에 기대는 영화는 결국 대중의 외면을 받고, 잊힐 것이다.
우리가 <그저 사고였을 뿐>에 대해 던져야 할 질문은 '과거에 얼마나 처절한가'가 아니라,'상처 이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다시 혼자 혹은 더불어 서는가'여야 한다. 그 답을 찾고 담아내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정치적'이며 '예술적'인 행위이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는 80년대의 유치한 상상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너무 익숙하고 허술한 관념이다.
https://v.daum.net/v/20251008111627311
맨 왼쪽 김향득 작가
김향득 작가의 나를 담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