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기 전
20년이 지난 올드보이에 대한 글 하나.
"이 영화는 단적으로 오누이의 근친과 부녀의 근친을 병렬로 하여 미스터리화한 한국 최초의 근친 영화이다. 고딩 때 오누이 근친을 목격하고 소문을 낸 친구를 15년 동안 가두고 그와 비슷한 근친적 복수(부녀의 근친)로 그 남자를 복수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누이와 사랑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사랑했지만, 너희들은 그럴 수 있겠느냐"라고 이야기 듯하는 주인공의 절규는
주제적으로도 불교 교리에 몸으로 짓는 죄, 혀로 짓는 죄, 의식으로 짓는 죄를 설파한 기원전 6세기 부처의 설법만큼, 20세기 입으로 짓는 죄에 대한 설교 중 금세기 보기 힘든 설법의 힘도 있다.
또한 , 엘렉트라 콤플렉스와 몬테크리스토 백작 등 고전 문학과 신화의 접경까지 발전한 이야기의 절정이었던 일본 만화 '올드보이'를 이미 비루한 한국의 영화들에 지친 오감각들을 겨냥한 테러와도 같다"
원작 만화와 영화
만화 원작에서 모든 비극은 '고독'과 '부끄러움'이라는 개인의 취약한 내면에서 시작된다. 가해자가 친구들에게 놀림받는 노래에 홀로 웃지 않는 갇힌 남자아이(피해자)를 보는 것이 복수의 동기입니다. 이는 외부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가장 사적인 슬픔, 수치심과 고독감에서 출발합니다. 복수 또한 상대에게 직접적인 육체의 고통을 주기보다, 출소 후 자신을 사랑하게 된 여자를 살해하도록 조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원작의 복수 설계는 '파괴적 명령'과 '사랑'이라는 상반된 힘을 충돌시키며, 결국 남자가 여자를 죽이지 못하고 사랑을 택함으로써 복수가 좌절되는 구원적인 결말을 내포합니다. 이는 인간의 감정적 리얼리티, 즉 사랑의 힘이 복수의 잔혹한 논리를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의 여지를 남깁니다.
그러나 영화 <올드보이>는 이 모든 윤리적이고 심리적인 층위를 걷어내고, '조작된 근친'이라는 파괴적인 금기로 복수 메커니즘을 대체합니다. 고교 시절 오대수가 친누나와 남동생의 음란한 장난을 목격하고 소문을 내어 누이를 자살에 이르게 한 죄는, 복수자에게 '근친'이라는 금기를 복수로 갚겠다는 논리를 부여합니다. 이우진은 오대수의 아내를 살해하는 것을 넘어, 오대수의 딸에게 최면을 걸어 그와 부녀간의 육체적 관계를 맺도록 치밀하게 조작합니다 이는 단순한 각색의 차원을 넘어, 두 작품이 인간의 죄와 고독, 그리고 파국을 바라보는 시각과 수준 자체가 다르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것은 터부와 금기에 대한 스릴과 위기에다가 경향적인 영상 테크닉을 버무린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최소한 이 영화는 미국에서는 먹히지 않으나 유럽에서는 먹힐 수 있을 것도 같다.
광폭한 이미지가 이야기의 피를 먹는 드라큘라가 된 영화. 이것은 20세기 닭과 X 하는 중광의 설법일 뿐이다.
폭력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적용되는 것이기에 사람에 따라 이 영화는 지워지지 않을 가혹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김기덕감독과 비교한다면 오십 보나 백보나 다르지 않지만 그 대우나 반응은 하늘과 땅차이었는 것은 한국영화계의 카르텔과 '진영'과 '출신성분'과 관련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깐느의 미학적 엘리뜨주의와 정치적 우월주의는 김기덕의 영화에 대해서는 단 한 번의 수상을 안기지 않았다)
세상 어디에서나 나름의 계급과 카르텔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하다. 김기덕은 한국영화계나 문화계내에서 정치적으로 매장된 인물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근친이 주요 주제라기보다 복수의 메커니즘 안에 들어 있는 “금기의 장치”로 사용된 것이고
오대수의 근친(부녀 관계)은 친구 이우진의 복수 계획의 결과로 ‘조작된’ 비극이지만 결국 관객에게 다가가는 원작과 아무 관련 없는 근친을 상처와 고민 없이 기획적으로 남용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 상을 준 깐느는 너무 여린 사람들에게 상상의 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올해 2025년 깐느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그저 사고였을 뿐"은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땅을 팠지만 고뇌하는 정치사회적 인간성에 대한 작품이었다면 블랙코미디라는 장치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자신의 생존이 아니라 포만의 유지를 위해 살인을 남용하는 자본주의 상상의 원작을 빌려온 '어쩔 수 없다"가 동시에 올라갔다.
솔직히 현실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 몇 명을 죽이든 어떻게 죽이든 무슨 상관인가?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살인이 빠지는 영화를 찾기가 더 힘든 시대인데.. 그냥 엘리드브로조아지의 독특한 집단기획의 상상을 즐기면 되는 것인데 (내가 알기론 박찬욱감독은 개인작업이 아니라 팀 작업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안다) 뭐 그리 윤리적이고 획일적인 보편 기준으로 재단하려 드는가?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게 다 맞다. 어쩔 수 없다. 박찬욱감독도 생존하려면 어쩔 수 없고 관객들도 호기심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
올드보이에 대한 글 이후 나는 그의 영화를 보지 않는다.. 그 글 하나로 벌떼처럼 공개사과, 방장사퇴라는 웃지 못할 요구가 빗발쳤다. 물론 의미 있는 창작 토론의 과정이었다. 자신의 재능을 그 정도의 창작적윤라 감성을 가졌다면 안 봐도 이미 내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다. 자신의 오리지널 창작이 아닌 항상 해외의 원작을 비틀고 자기만의 해석을 가한 작품을 내는 감독을 거장으로 불러 주어야 할지도 나는 망설여진다. 직접 자신의 시선으로 만든 시나리오가 있는 감독과 자신의 노래를 작사 작곡을 하는 가수는 더 대우받고 있다.
나의 속 좁은 복수는 20년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한국영화계는 다 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주저하고 있다. 더 나가 신문이나 방송이나 갑자기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 호들갑이다. 마케팅이 거세다. 패거리들의 합창은 작은 장점도 확대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많은 장점의 작품도 무명한 감독의 작품은 흠을 먼저 찾게 마련이고
단지 나는 그의 상상이 나의 영혼으로 끼어들어 오는 것을 봉쇄하고 싶을 뿐이다.
가능하면 나의 아이들에게 그의 상상을 은폐하고 싶을 뿐이다. 세상에는 거룩한 상상도 유치한 상상도 숭고한 상상도 비루한 상상도 혼재한다. 아마 이란 영화들은 영화적 상상이라도 비록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에서라도 사람 한 사람을 쉽게 죽이는 상상을 피해 다른 방식의 상상을 하려고 할 것이다. 살인은 글로벌 문화상품의 최대 소재와 화두가 되었고 이미 그 봇물이 터져버렸지만 이야기의 배경은 리얼리즘적이면서 유독 이유도 안 되는 살인에 대해서만 블랙코미디로 이해하라는 이상한 무속적 압박과 주문을 할 것 같은 영화를 봐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나도 어쩔 수 없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난 이 글을 추가하려 한다.